공작원 초대소, 여섯 번째-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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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여섯 번째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가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다. 오전 11시쯤 정 지도원이 벤즈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싣고 출발했다. 차는 동북리 10호 초대소를 출발하여 큰길로 나가 평양시내 쪽으로 달리다가 룡성을 얼마 남겨놓고 오른쪽으로 꼬부라져 합장강 다리를 건너 비포장 농로를 20여분간 달리니 삼거리가 나왔다.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길을 택하여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30분 동안 달렸다.
차가 멎은 곳은 입불산 계곡에 자리잡은 울타리 없는 단층 세멘트 건물 앞이었다. 건물 형태는 동북리 10호 초대소와 비슷했으나 낡은 데다가 비오는 날씨에 도착해서 그런지 더욱 스산해 보였다.
금성정치군사대학 본청사는 이곳에서 산을 몇 개 더 넘어야 되는 먼 거리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공작원이 침투나 복귀할 때 안내하는 임무를 맡은 전투원을 집체적으로 양성했으며 공작원은 이처럼 초대소에 밀봉 수용하여 양성했다.
금성정치군사대학 내에 공작원 양성 초대소는 골짜기별로 ‘금강산 골짜기', ‘칠보산 골짜기' ,‘묘향산 골짜기' 등으로 나뉘었고 각 골짜기에는 1지구, 2지구, 3지구,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또 각 지구마다 몇 개의 초대소를 갖고 있었다. 우리가 수용된 초대소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였다. 이 묘향산 골짜기에는 8개의 초대소가 있다.
이 초대소 밖에는 입구 쪽에 과실 남새밭이 있고 마당 왼쪽에 야외 탁구대, 오른쪽에는 평행봉이 설치되어 있으며 초대소 건물과 나란히 훈련장이 자리잡고 뒤쪽에는 창고와 토끼 우리가 있다. 초대소 내부는 3개의 방과 세탁실, 화장실, 창고, 그리고 벽난로 등이 놓였다. 각 방마다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복도에는 비닐장판을 깔아 놓았다.
이 초대소에는 식모가 없었다. 식모가 없기 때문에 우리 자체로 청소, 세탁은 물론 초대소 마당에 나는 풀을 뽑고 사육하는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일까지 하고 벽난로에 불도 때야 했다. 이 초대소에 들어와서 처음 몇 개월 동안은 물이 나오지 않아 그 부근에 있는 샘터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식사는 종합 취사장에서 지은 밥을 관리원 아저씨가 날라다 주었으며 식당 옆 강의실에서 강의를 받는 날이면 강의실로 날라다 먹었다.
우리가 이 초대소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 10시에 강의실에서 입학식을 거행했다. 입학식에는 학장, 부학장, 묘향산 지구장, 교양 지도원이 참석하였고 교육생은 숙희와 나 외에도 다른 3개조가 있었으나 각 조마다 칸막이가 되어 있어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지금부터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교양 지도원이 개회 선언에 맞추어 록음기가 틀어지고 우리는 일어서서 차렷자세를 취했다.록음기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에 이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노래' 가 흘러 나왔다. 다음은 식순에 따라 학장의 훈시가 있었다.
“동무들이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크나큰 신임과 배려에 의해 우리 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학장은 우선 우리들의 입학을 축하하고 훈시로 넘어갔다.
“우리 학교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의도에 따라 남조선 혁명을 위해 꾸려졌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영웅과 혁명가들이 자라난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 훌륭한 교원들이 잘 가르쳐 주겠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명 안되는 교육생을 놓고 치르는 입학식이었고 학장의 훈시였지만 우리 모두는 진지하고 엄숙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