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스무 번째-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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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무 번째
조선말은 못 알아듣는 척해야 했는데 순간 착각을 해 수사관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앗차' 하고 실수를 깨달았으나 이미 쏘아놓은 화살이라 그 순간만을 모면하려고 “표정으로 다 알 수 있다”고 얼버무렸다. 중국어만 하고 있자니 이들에게 더 많은 미끼와 의문만 던져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주장하던 내용도 모두 뒤죽박죽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정리해서 밀어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일본 말로 말했다.
“신이찌와 동거하던 집도 그가 일본이라고 하니까 일본인 줄 알았을 뿐 지금 생각하니 일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나는 여태까지 주장하던 내용을 뒤엎어 버렸다. 치밀한 계산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순식간에 진술 내용을 뒤엎으면 당연히 그들이 화를 내면서 달려들어 손찌검을 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내색조차 하지 않고 담담하게 일본 말로 받았다.
“그래? 그러면 집에서 테레비를 보았다고 했는데 어느 방송이었지?” “그건 분명 일본 NHK, 아사히 방송이었습니다.”
텔레비죤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었다.
“신이찌 집에 있던 테레비의 상표가 뭐였는지 기억나겠지?”
텔레비죤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 끝에 나온 질문이었는데 나는 정신없이 “쯔쯔지”라고 대답해 버렸다. 쯔쯔지라는 상표는 ‘진달래'라는 뜻으로 북에서 생산되는 텔레비죤이였다. 이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북한제 텔레비야, 이 사람아.”
그들은 딱하다는 듯이 지적해 주며 또 웃었다. 그들에게 쉽게 넘어가는 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수치심이 분노로 변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입을 굳게 봉하고 헛기침 몇 번으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들이 북조선 텔레비죤 상표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북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텨 나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텔레비 상표를 잘못 말한 것 하나 가지고 북조선과 연관시키려 들다니 너무해요. 이제부터 아무 답변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 이후 어떠한 질문을 해도 고개를 숙인 채 꼭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집중적인 질문에 입을 다문 채 답변하지 않는데도 그들은 어조를 높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끈기 있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물고 늘어졌다. 그들의 끈기와 인내심은 정말 탄복할 만 했다.
도저히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다행히 점심식사가 들어왔다. 잠깐 숨이라도 돌릴 수 있게 되어 살 것 같았다. 뒷일이 암담하여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것처럼 맥이 빠졌다. 물론 밥맛도 나지 않았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휴식이 없이 다시 그 지긋지긋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오후에도 신이찌와 관련된 여러 사항과 텔레비죤 문제, 나리따 공항 출국 도장의 위조사실 등에 대해 집중적인 추궁을 받았다. 나는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시종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다.
“마카오에서 많은 남자들과 호텔에도 가고 신이찌와 장기간 동거도 했는데 아직까지 남녀 관계가 없었다는 게 말이 돼? 편하게 살자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칼까지 맞아가며 정조를 지킬 필요가 있었을까?”
그 질문은 말할 수 없이 치욕적이었다. 나는 이 말에 독이 나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