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네 번째-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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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네 번째
나는 남조선 특무가 베푸는 친절과 관용 뒤에 숨어있는 비수를 생각했다.
‘나는 절대 너절한 배신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조선 독립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위대한 김일성 수령과 앞으로 우리 조선 인민을 향도해 나갈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맹세한 몸이다.' 나는 혁명정신에 불타올랐던 공작원 생활 시절을 되새기면서 나를 채찍질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내일 닥칠 일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낼 수 없었다.
‘내일은 좀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겠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일단 시간이라도 좀 벌어 가면서 대책을 세우기로 하자.' 나는 속으로 내일은 성의 있는 대답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들이 바라는 대답은 못해 줄망정 성실한 태도로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세라도 보일 생각이었다.
12월 21일. 어젯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별의별 궁리를 다 해 보았지만 역시 해답은 없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6시 반에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세면 뒤에 가벼운 운동까지 해보았지만 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리가 띵 하니 맑지 못했다. 이날따라 아침도 먹기 전부터 수사관들은 내 여권을 가지고 와서 사진을 어디서 찍었느냐고 물었다. 어젯밤 그들의 비위를 좀 맞추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른 아침부터 고아대는 그들이 밉살스럽기만 했다.
‘비위를 맞출 것이 아니라 이놈들과 견결히 투쟁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그 여권 사진은 내가 아니라고 우겼다. “그럼 누구냐”는 말에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막무가네로 떼를 썼다. 이런 당돌한 도전을 받고 수사관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사관들 중 우두머리가 눈짓하자 여자수사관 한 명과 남수사관 한 명만 내 방에 남고 모두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태도가 돌변하자 자기들끼리 회의를 가지는 눈치였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수사관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수사관 두 명이 명랑한 표정으로 들어와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간간히 잡다한 질문도 섞어 물었다. 나는 소파에 바위마냥 버티고 앉아 입을 굳게 다물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나서 울었다. 보다 못한 수사관들이 잡담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잘 생각해서 너의 태도를 결정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너 자신이 더 잘 알겠지. 우리는 네가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 말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어. 비행기에는 115명이 타고 있었어. 그중 승무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근로자들이야. 이 근로자들은 아무 죄가 없어. 정치나 이념, 체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야. 오직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그 뜨거운 나라로 돈 벌러 갔던 사람들이라구. 외국 땅, 그것도 모래사막에서 피땀을 흘리며 고생하던 사람들이었어. 그리운 가족과 몇 년씩 헤어져 살다가 이제 돈을 벌어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귀국하던 길이야. 네가 어떤 이유 때문에 이번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모르나 아무리 그럴듯한 변명을 붙이더라도 근로자들을 희생시킨 것은 벼락을 맞아 마땅한 짓인거야. 짐승이나 할 짓이지 인간이 할 짓이 못 돼. 우리는 이 일을 여자인 너 혼자 꾸미고 해냈다고는 생각지 않아. 너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시킨 배후를 대고 속죄하는 것이 옳잖아? 우리 인간이 가장 인간적인 요소를 잃는다면 그게 짐승이지 어디 인간이라고 하겠어? 잘못을 깨달으면 빨리 뉘우치고 용서를 빈 다음 속죄의 길을 가야 하는 거야.”
수사관은 나의 인간적인 양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