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세 번째-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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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세 번째
집을 떠난 지 아주 오래 된 느낌도 들었고 뭔가 해야 할 일을 빠뜨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매일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 바삐 살던 것이 습관이 되여서 그런 것 같았다. 일손을 놓고 모처럼 편안히 쉬자니 할 일을 잊은 듯하였다.
초대소의 밤은 적막하기만 했다. 오직 바람에 나무잎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였다. 밤 늦도록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다 되여서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도 다른 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체조를 하려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식모가 달려 나오며 “일찍 일어나셨네. 더 주무시지 않고서리..” 하고 반겨주었다. 마당으로 나가 가슴을 펴고 팔을 벌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초봄의 산내음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들면서 온몸을 상쾌하게 했다.
맨손체조로 몸을 푼 뒤 초대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마당 구석에는 김일성 교시판이 있었다. 교시판에는 학교 때부터 익히고 보아 온 문구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세대에 남조선 혁명을 완수하고 조국을 통일하여야 하며 통일된 조국을 후대들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이 교시는 김일성이 1967년 12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이였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초대소 내에서는 세멘트 블로크로 지은 탁구장 건물과 부식물 창고가 있었다. 뒤마당 구석 한편에는 딸기밭과 과실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줄넘기로 땀을 내고 샤워를 하고 나니 식모가 식탁에 아침 식사를 차렸다고 알려준다. 전날 저녁에 식모가 아침 식사는 밥과 빵중 어떤 것을 들겠느냐고 물어와 빵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계란 후라이를 얹은 식빵, 우유, 빠다, 도마도 등이 식탁에 올랐다. 사회에서는 구경하기 조차 힘든 식빵이였다. 집에 있을 때, 딱딱하게 굳은 긴 통짜빵을 공급 받으면 칼로 일일이 잘라 내여 아침 식사때 찌거나 구워서 내오곤 했다.
어릴 적 꾸바에서 살 때 해보고 처음 해보는 서양식 식사라 어색하기까지 했다. 식사를 마치고 초대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좌우측으로 같은 크기의 방이 있는데 우측 방이 내가 쓰는 침실이였다. 이 방에는 침대, 책상, 소파, 옷장과 책장, 그리고 천연색텔레비죤이 있었으며 벽에 김일성의 교시판과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책장에는 제법 책이 많이 꽂혀 있었으나 대부분 학교 때부터 읽던 것들이였다. 김일성 혁명력사와 <항일 무장투쟁 회상기>, <인민들 속에서>,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저작선집> 들이였고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통일혁명당 주요 문서집> 이라는 책이였다. 사회에서는 대남 공작원의 신화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돌고 그것이 화제에 오를 때가 많다. 그래서 대남 공작원의 활동상에 대한 영화는 인민들에게 꽤 인기가 좋다. ‘목란꽃', ‘적후의 진달래'의 녀주인공, 그리고 20부작으로 나왔던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적 방첩대 장교가 되여 활약하는 녀주인공 순희 역할은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일반 사회인들은 대남 공작원이라면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같고 소설 같은 신비로운 일이 나 자신에게 닥쳐 왔으니 가슴은 벅차 오를 뿐이였다. 내가 쓰는 방의 건너편 방은 식당 겸 침실이였는데 4인용 식탁과 침대, 책상이 있고 화장실 겸 목욕실이 붙어 있었다. 현관 맞은 편에는 부엌이 있고 옆으로 식모 방이 붙어있다. 식모방에는 전화기도 있었다. 전화는 주로 과와 련락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였다.
첫날은 책장의 책을 뒤적이면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 정 지도원이 대학생복 차림의 내 또래의 녀학생을 데리고 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