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스물 여섯 번째-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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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스물 여섯 번째
단복을 받고 혼란에 빠져 우울해 하는 나를 보며 마리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자꾸 쳐다보았다. 마리아가 돌아가고 오후 2시 쯤 테리라는 영국인 수사관이 오꾸보를 데려왔다. 테리는 바레인에서 고용되어 수사기관에서 간부로 복무하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테리와 오꾸보는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혀놓고 조사를 시작했다. 미리 타자를 쳐 온 질문표를 보며 일본어로 물었고 답변 내용을 거기에 써 넣었다. 질문 내용은 유럽 여행시 행적, 일본에서의 생활 정형 등 역시 전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전에 말해주었던 내용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했지만 어딘가 전과 틀린 점이 없는지 불안했다. 나에게도 녹음기 같은 기계가 장치가 되어 있어 똑같이 말 할 수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짓으로 꾸며대는 말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도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게 되면 자꾸만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세한 질문이 나오면 멍청한 사람처럼 굴었다. 개괄적이고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만 대답하려고 애썼다.
심문 중에서도 오꾸보에게서 받는 심문이 제일 싫었다. 오꾸보는 다른 간호사나 경찰관이 나를 동정적이고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과 달리 매우 쌀쌀맞고 냉정하게 대했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너를 돕고 싶다.”
그 말을 할 때도 형식적인 인사처럼 사무적으로 말했다. 나는 일본 여자 오꾸보가 싫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핸더슨이 키가 크고 갱핏한 체격의 영국인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귓속말로 수군거리다가 돌아갔다. 언제나 낯선 사람들이 나타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마련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예삿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요?”
곁에 있는 간호원에게 슬쩍 물어 보았으나 그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데로 옮겨서 다시 조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태까지 조사한 내용은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드디어 폭력을 쓰려는 것은 아닌가?' 나는 여러 방면으로 궁리를 해보았지만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고 곧 그 일이 나에게 들이닥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낯모르는 영국인이 가고 얼마 있다가 마리아가 찾아왔다. 방문객 중에는 그녀가 제일 반가운 손님이었다. 마리아는 다른 때보다 시간적으로 이른 시간에 나타났다. 다른 날보다 유달리 상냥하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많은 말을 떠벌였다.
“마유미,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기뻐. 얼굴이 더욱 예뻐졌어.”
내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나에게는 아들이 둘 있어. 큰아들은 오지리에서 사업하고 작은 아들은 오스트랄리아에 가 있지. 우리는 바레인에 있고. 몇 안 되는 식구가 다 각각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아.”
그녀는 자기들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난 마유미를 좋아해. 마유미는 예뻐.”
마리아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작별 인사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따뜻이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마리아는 “천만에, 천만에.” 하며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를 떠보기 위해 말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