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여섯 번째-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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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여섯 번째
나는 커피잔을 들고 화장실에 가서 세면대에 쏟아버리고 물로 종이컵을 깨끗이 씻는데 여자수사관이 그냥 버리라며 쓰레기통을 가리킨다. 나는 종이컵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멀쩡하고 좋은 걸 왜 버리는 거야, 한참을 쓸 수 있겠는데?'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구라파 여행 중이나 마카오 생활 중에도 커피 자동판매기를 이용해 보지 않아 종이컵에 대해 전혀 몰랐다. 바레인에 있을 때도 플라스틱 컵으로 차를 주곤 했는데 씻어서 다시 쓰는 줄 알았다. 그것을 씻어서 다시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남조선에서 여자수사관이 가리키는 대로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아까운 마음이 들었고 남조선 사람들이 상당히 랑비적이라고 생각했다. ‘외국 빚으로 사는 형편에 낭비가 심하구만' 하는 식이었다. 아침식사로는 흰 죽과 간장, 달걀 지짐, 그리고 김치가 나왔다. 나는 아침식사를 거절했다.
“얘. 먹어야만 돼. 빨리 건강을 회복하려면 식사를 잘 해야 하는 거야.”
옆에 있는 여자수사관이 말하면서 숟가락을 들어 죽을 떠먹는 시늉을 한다. 강제로 내 손에 숟가락을 쥐어준 다음 죽 그릇 앞으로 끌어당겼다. 몇 번 실랑이를 벌이다가 할 수 없이 죽 몇 술 뜨는 시늉만 했다. 사실은 김치가 먹고 싶었지만 과일단물과 계란 지짐을 먹었다. 또 조선 사람이니 어쩌니 할 것이 틀림없어서 김치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이제는 조사가 시작되겠지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그래. 조금씩이라도 먹어야지. 식사했으니 좀 쉬어.”
여자수사관은 식사 그릇을 물리고는 침대를 가리키며 누워 쉬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나를 끌어다 놓고 조사는 언제 하려는 속셈인지 오히려 내 쪽에서 안절부절했다.
‘지금 밖에서는 남조선 려객기 KAL기 실종과 관련된 나의 처리 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려고 야단법석일 텐데 조사도 않고 태평스럽게 쉬라니....' 두 시간마다 의사가 와서 검진을 하고 갔으며 여자수사관들은 다친 무릎에 뜨거운 물찜질을 해주려고 연방 수건에 물을 적셔 날랐다. 바레인에서의 친절과는 또 다른 친절이었다. 바레인의 간호사와 여자경찰들은 그저 마음만 좋고 인정만 많을 뿐 알뜰살뜰한 치다꺼리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남조선 특무들은 친형제 같은 사랑으로 있는 정성을 다 했다. 이것이 친족애인가 하는 해이한 정신 상태로 가끔 감동에 젖기도 해보았다. 바레인에서 끌려오기 직전에 비행기 앞에서 얼핏 본 여자수사관이 다른 여자수사관에게 자기들끼리 하는 말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얘 생리가 언제쯤일까? 알아야 조치를 해줄 텐데 말이야..”
그 소리를 듣고 나 역시도 걱정되고 조치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얼결에 ‘세이리?' 하고 일본말로 반문하고 백지에 ‘24' 라고 써주었다. 이 경솔한 행동에 대해서도 곧 후회했다. 못 들은 척 할걸 괜히 나서는 바람에 모든 정체가 탄로 날 것 같았다. 왜 자꾸 성급한 실수를 저지르는지 내 행동을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타일렀다. 바레인에서는 영어, 아랍어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해 버리기가 쉬웠는데 이곳에서는 자꾸 조선말을 쓰기 때문에 얼떨결에 아는 척을 해버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심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넘겼다.
나는 어제 밤에 꿈도 없이 푹 잘 잤고 아침에는 목욕까지 해서 그런지 정신도 한결 맑아지고 원기도 상당히 회복된 듯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