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여섯 번째-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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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열 여섯 번째
1988년도 12월 10일자 남조선 신문에, 북조선 녀성들이 식생활과 관련해 담화한 내용이 실린 적이 있다. 담화에 참가한 녀성들은 밥공장을 리용하기 때문에 저녁 준비에 쫓기지 않고, 국가로부터 쌀 공급을 풍족하게 받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에 이곳에서 수사관들로부터 조사를 받는 중 북조선의 식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이 제일 싫었다. 대답하기 부끄러운 부분이였고 또 한편 호의호식하는 것만이 인간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냐고 대들고도 싶었다. 상세히 답변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신문에 나온 내용을 보면서 수치감 때문에 또 한번 얼굴을 들기 어려웠었다.
그들이 자랑삼아 밥공장 리용과 쌀 공급의 풍족함을 행복한 듯이 말하고 있었는데, 만일 남조선 사람에게, “나는 매일 이밥에 고기국을 배불리 먹고 있소.” 하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랑 거리가 되겠는가 . 정신이 나간 사람 취급을 받거나 수상쩍은 사람으로 오인받을 일이 분명하다. 그런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랑스레 떠들어 대고 그 나마도 그 내용이 거짓말이니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가. 내가 그곳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쥐구멍에 기어들고 싶었다.
북조선 녀성들이 그 무슨 밥공장에서 밥을 찾아다 저녁상을 차린단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하자면 저녁 5시에 퇴근한다는 녀성들이 집에 가서 무슨 바쁜 일이 있기에 밥공장에서 밥을 가져다 남편 상을 차리겠는가. 그것만 해도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북조선은 근 몇 년간에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내가 1987년 4월에 집에 갔을 때 평양에서도 중상류 수준인 우리집도 배급쌀로는 하루 세끼 다 밥을 먹기가 어려워 죽을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 또 장마당에서 일곱배 정도의 비싼 값으로 식량을 사들여 보태지 않으면 안 되였다. 이렇게 어려운 사정에서도 1987년도에는 전당, 전민적으로 1년 배급량 중 2달분을 공제한 뒤 배급을 준 것을 소학교 학생들까지도 다 알고 있다.
주부들의 걱정과 원성이 한층 더해지고 인민반 같은 곳에 모여 앉으면 밥을 지을 때 무얼 얹어야 식구들 배를 채울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배급량이 잡곡 몇 %에 입쌀 몇 %라는 말이나, 1인당 몇 g이라는 숫자는 단지 숫자일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강냉이, 조는 물론이지만 고구마, 감자까지도 잡곡에 포함된다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닌가.
북조선 녀성들은 북조선의 물가는 눅고 월급은 많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북조선의 현재 실정은 물건 값이 눅고 비싸고 문제가 아니라 비싸게라도 살 물건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또 북조선 녀성들은 목사 월급이 170원으로 중앙당의 높은 간부와 똑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평양에서 26년간 살아왔지만 한번도 목사를 보지 못했는데 목사 월급까지 책정되여 있었다니 이곳에 와서 새롭게 배운 것 중의 하나이다.
나는 신문 담화에서 떠들어댄 북조선 녀성들을 조금도 탓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숨기고 김일성 부자에게 오로지 복종과 충성만을 맹세하면서 북조선만이 지상락원이라고 앵무새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한없이 불쌍하고 가슴 아플 뿐이다.
가여운 고향 사람들, 나는 남조선의 넘치는 풍족함을 대할 때마다 세상이 너무 고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불행에 가슴이 메인다. 물론 이곳 국민들도 이처럼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썼겠지만 고생으로 말하면 북조선 인민들이 더 피나는 고생을 하였을 터인데 그 대가는 너무나 천지 차이가 나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거기에는 아직 나의 사랑하는, 내 피와같은 가족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