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여섯 번째-26
[...] 나의 대학시절, 여섯 번째
호위국 고급 군관 딸인 명숙이가 자유주의로 비판을 받고 난 후 그애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벌어졌다. 나는 선생의 지시에 따라 그애를 찾으러 갔을 뿐인데 관계가 묘하게 꼬인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는 가운데서도 지도 선생과 학생들의 열성적인 참여로 본공연을 가졌다.
‘2.8문화회관' 관장의 아들이 우리 대학에 재학중인 덕분에 2.8문화회관 내에 있는 천석 극장을 빌렸다. 기념식 날에는 북조선의 교육정책 총책임자 ‘황장엽' 도 참석하여 교원들에게 ‘국기훈장' 과 ‘공로메달' 을 수여하고 우리 학교에 대하여서는 ‘김일성 영예훈장' 을 수여해 주어 학교 성원과 학생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우리 화술조도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자축 모임을 가졌다. 락원거리 중앙당 아빠트에 사는 어느 언니의 집에서 지도 선생을 모시고 같이 식사를 했다. 20여 명의 소조원이 각각 10원씩 내여 음식거리를 장만했는데 북조선에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각자 재간껏 구해 오도록 의견을 모았다.
소조원들이 거의 남산학교 출신이고 중앙당 간부 집 아이들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장만되였다. 특히 김정숙과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김명화의 손녀딸은 일반 주민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밀가루를 구해 와서 감자부침을 만들었고, 엄마가 어느 호텔 책임자라는 언니는 소세지까지 구해왔다. 남학생들은 매구도 장만했다. 나는 마침 우리동네 두부공장이 있어서 새벽부터 줄을 서서 두부 몇 모를 구했다. 어떤 남학생이 카메라를 가져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후에 이 사진이 문제가 되여 나의 큰 고민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문화부 부부장의 아들 장수명은 남산학교 출신으로 영어과에 재학중이였다.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긴 편인 데다가 아버지가 예술 분야의 높은 간부라서 그런지 배우와 련애를 한다느니 어느 과의 누구와 련애중이라느니 하는 뒤이야기가 많은 학생이였다. 녀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를 모르는 애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남학생과 같이 사진을 찍었으니 감수성이 예민하고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녀학생들이 가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얌전한 척하면서 뒤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런 남학생과 사진을 찍을때야 보통 사이겠어?” “그렇지 않다면 허구많은 녀학생 중에서 왜 하필 현희에게만 사진을 찍자고 했갔니?”
가당치도 않은 뒤소리가 꼬리를 물고 내 귀에 들려 왔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그 사진을 찢어 버렸지만 뒤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되여 나를 괴롭혔다. 말할 곳이 없고 답답해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 했더니 어머니는,
다 큰 녀자 아이가 아무 생각없이 남자와 사진을 찍은 것 자체가 그런 말을 들어 싸다며 오히려 내 경솔한 행동을 꾸짖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으로 어머니에게 꾸중만 듣고 기분이 상했다.
당시 북조선에서는 대학생이 련애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여 만일 련애하는 사실이 탄로나면 무조건 퇴학을 시켰다. 그래서 대학 내에서 어느 남학생과 녀학생 둘이서 같이 걸었다든가 후미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동무들 눈에 띄기만 하면 당연히 뒤소리를 듣게 되여있다.
그러나 아무리 학교에서 엄격하게 통제한다 하더라도 사고는 자주 일어났다. ‘영희'라는 프랑스어과 졸업반 녀학생은 백두산 답사를 갔다가 ‘만수대 창작사'에서 일하는 남자와 눈이 맞아 임신하여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퇴학당하고야 말았다. 이렇듯 북조선에서 남녀관계는 개인적인 망신을 당하는 것 뿐 아니라 신세를 망치는 일이 되기도 해서 은밀히 하려고 애쓰지만 들통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