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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열 여섯 번째-16

나의 어린시절, 열 여섯 번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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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여섯 번째

나는 북남조절위원회 회담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준 것 외에도, 많은 행사에 꽃다발을 증정하는 소년단원으로 참가했다.

1971년 12월 말 저녁 7시. 평양 학생소년궁전에서 평양시 청소년 학생들의 ‘설맞이 공연' 이 있었는데 이때 김일성이 참석했다. 나는 이 행사에 참석 하는 김일성 일행에게 소년단 넥타이를 매어주는 학생 대표 5명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나는 김일성을 따라 세 번째로 입장하는 김일에게 소년단 넥타이를 메어주었다.

1972년 4월 25일. ‘김일성 광장'에서 개최된 ‘인민군 창건 40돌 기념 무력시위행사' 때도 학생대표로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게 되어 있었다. 행사 당일 교통 통제로 인해 행사장 부근에 살던 동무 집에서 잠을 잤다. 행사 당일 막상 행사장에 도착해서 보니 행사복이 더러워져있었다. 그동안 연습할 때 입은 뒤 세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옷소매와 동정이 새까맸다. 행사 간부에게 이것이 지적되어 즉석에서 당초 계획이 변경되었는데, 결국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사람은 다른 학생으로 바뀌고 나는 두 번째로 입장하는 간부에게 꽃다발을 주었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거나, 악수 한번만 해도 동무들이 그 애 손을 다 만져 보며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1972년 11월. 캄보쟈 국왕인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다. 연도 환영이 계속되고 평양 대극장 앞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환영 꽃다발을 증정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여학생 대표 8명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김일성의 처 김성애에게 꽃다발을 주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집 딸들은 뽑혀 나가는데 무슨 인연이 있는지 동생 현옥이 역시 자주 큰 행사에 동원되었는데, 현옥이는 1974년 5월 아프리카 세네갈 공화국 센고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기념 사진에 찍혀 로동신문에도 크게 나온 적이 있었다.

현옥이는 하신인민학교에 다니면서 ‘평양 학생소년궁전'의 손풍금 소조원으로 활동했는데 센고르가 평양에 왔을 때 김일성과 같이 소년궁전을 참관한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이때 현옥이는 김일성과 센고르 여자 사이에 서서 김일성의 팔장을 끼고 있었다. 이 사진은 로동신문과 민주조선문에 크게 실렸고 현옥이에게도 이 사진이 선사되어 큰 영광이라며 액자에 넣어 우리집 안방에 걸어 놓았다. 하신인민학교에서도 이 사진을 가장 잘 보이는 현관에 게시하였었다.

하신인민학교에서는 ‘현희와 현옥자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옥이는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고 더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언니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현옥이는 은근히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당에 소환되면서 현옥이의 경쟁 심리는 사그라든 것 같았다. 중앙당 소환이란 그리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현수 역시 하신인민학교에서 공부 잘 하고 총명하기로 소문이 나서 우리 3남매는 모두 하신인민학교를 빛내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한 셈이었다.

나는 중학교에서도 소년단 간부를 맡아 일했다. 소년단 부위원장, 분단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억센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가 앞에서 구령하고 보고할 때는 아이들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명순이라는 학생은 공부는 좀 뒤떨어지지만 아이들을 틀어쥐는 능력이 뛰어났다. 나는 가끔 그런 면에서 명순이를 부러워했었다. 명순이는 내가 1980년도경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소환될 때쯤 제대군인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사내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끝내 내가 승리했다는 우월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길을 가는 그녀가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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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여섯 번째-16 Meine Kindheit, sechzehntes bis sechzehntes Jahr My Childhood, Sixteenth-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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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여섯 번째

나는 북남조절위원회 회담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준 것 외에도, 많은 행사에 꽃다발을 증정하는 소년단원으로 참가했다. In addition to giving bouquets to the South Korean delegation who attended the North-South Control Committee meeting, I participated as a boy presenting bouquets to many events.

1971년 12월 말 저녁 7시. 평양 학생소년궁전에서 평양시 청소년 학생들의 ‘설맞이 공연' 이 있었는데 이때 김일성이 참석했다. At the Pyongyang Student Youth Palace, there was a 'premature performance' of youth students in Pyongyang. 나는 이 행사에 참석 하는 김일성 일행에게 소년단 넥타이를 매어주는 학생 대표 5명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I was selected as one of five student representatives to tie the boys' tie to Kim Il-sung's party. 나는 김일성을 따라 세 번째로 입장하는 김일에게 소년단 넥타이를 메어주었다.

1972년 4월 25일. ‘김일성 광장'에서 개최된 ‘인민군 창건 40돌 기념 무력시위행사' 때도 학생대표로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게 되어 있었다. Kim Il-sung, a student representative, was also expected to give a bouquet to the student representatives during the 40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People's Army. 행사 당일 교통 통제로 인해 행사장 부근에 살던 동무 집에서 잠을 잤다. Due to traffic control on the day of the event, I slept in my comrade's house. 행사 당일 막상 행사장에 도착해서 보니 행사복이 더러워져있었다. 그동안 연습할 때 입은 뒤 세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옷소매와 동정이 새까맸다. 행사 간부에게 이것이 지적되어 즉석에서 당초 계획이 변경되었는데, 결국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사람은 다른 학생으로 바뀌고 나는 두 번째로 입장하는 간부에게 꽃다발을 주었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거나, 악수 한번만 해도 동무들이 그 애 손을 다 만져 보며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In North Korea, I missed a good opportunity at the time because I gave envy to Kim Il-sung, or even once I shake hands.

1972년 11월. 캄보쟈 국왕인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다. King Khamboja, Sihanouk, came to Pyongyang. 연도 환영이 계속되고 평양 대극장 앞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환영 꽃다발을 증정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The year welcome continued and when the car passed in front of the Pyongyang Grand Theatre, a welcome bouquet was organized. 나는 그때 여학생 대표 8명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김일성의 처 김성애에게 꽃다발을 주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집 딸들은 뽑혀 나가는데 무슨 인연이 있는지 동생 현옥이 역시 자주 큰 행사에 동원되었는데, 현옥이는 1974년 5월 아프리카 세네갈 공화국 센고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기념 사진에 찍혀 로동신문에도 크게 나온 적이 있었다. My sister Hyun-ok was also frequently used at a big event to find out what kind of ties my daughters were taking out. I had come out.

현옥이는 하신인민학교에 다니면서 ‘평양 학생소년궁전'의 손풍금 소조원으로 활동했는데 센고르가 평양에 왔을 때 김일성과 같이 소년궁전을 참관한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이때 현옥이는 김일성과 센고르 여자 사이에 서서 김일성의 팔장을 끼고 있었다. 이 사진은 로동신문과 민주조선문에 크게 실렸고 현옥이에게도 이 사진이 선사되어 큰 영광이라며 액자에 넣어 우리집 안방에 걸어 놓았다. 하신인민학교에서도 이 사진을 가장 잘 보이는 현관에 게시하였었다.

하신인민학교에서는 ‘현희와 현옥자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옥이는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고 더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언니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현옥이는 은근히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당에 소환되면서 현옥이의 경쟁 심리는 사그라든 것 같았다. |||being summoned|||||| 중앙당 소환이란 그리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현수 역시 하신인민학교에서 공부 잘 하고 총명하기로 소문이 나서 우리 3남매는 모두 하신인민학교를 빛내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한 셈이었다. |||||||being bright||||||||||||| His younger brother, Hyun-soo, was also rumored to be well-studied and intelligent at the Korean People's School, so all three of our brothers and sisters were firmly contributing to the Korean people's school.

나는 중학교에서도 소년단 간부를 맡아 일했다. 소년단 부위원장, 분단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억센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가 앞에서 구령하고 보고할 때는 아이들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nature|||||||calling out||||||||| 명순이라는 학생은 공부는 좀 뒤떨어지지만 아이들을 틀어쥐는 능력이 뛰어났다. 나는 가끔 그런 면에서 명순이를 부러워했었다. 명순이는 내가 1980년도경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소환될 때쯤 제대군인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사내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끝내 내가 승리했다는 우월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길을 가는 그녀가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