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다 -- 권여선 (3)
“손님들도 많이 계시고 해서...” 노파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을 잡고 뵈러 왔으니 여유를 갖고 기다려. 뭐 급한 일이 있다고? 왕고모님이 얼마나 섭 섭해하시겠나? 또 아나? 왕고모님이 좋은 선물을 주실지.” 노파의 말에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또 큭큭 웃었다. 환갑 넘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그녀는 세 여자가 자신이 큰고모님을 방문한 의도에 대해 무슨 낌새를 채고 자기들 끼리 눈짓을 해대며 번갈아 그녀를 떠보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고모님을 무슨 이유로 왕고모님이라고 바꿔 부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큰고모님 부부가 언제 이사 왔는지 모르는 걸 보면 이 집과 흉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상가 임대료나 파출업무 같은 사업 상의 문제로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여자들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들이 공연히 그녀에게까지 불순한 혐의를 두고 저의를 탐색하려는 것 같아 그녀는 가능한 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실내를 가득 채운 낡은 가구들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 얼룩덜룩 때가 낀 리놀륨 바닥 은 집주인의 오랜 방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퇴락한 분위기 속에 낯선 여자들과 함께 앉아 있자니 그녀는 약간의 곤욕스러움을 느꼈다. 침묵을 지키는 그녀가 못내 아니꼽다는 듯 마침내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애기엄마는 집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어?” 노파가 물었다. “전 정말 죽어도 여기 안 오려고 했어요.” 가운데 여자가 목숨이라도 건 듯 빠른 속도로 뜨개질을 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오게 됐어?”
눈꼬리 여자가 물었다. “즈이 큰형님 말씀이 사람이 살면서 너무 까칠하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옳지! 화곡동 사신다는 그니로군.” “네, 맞아요, 할머니. 즈이 큰형님은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세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 들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들 여러 군데서 알아보고 다닌다네요.” “그렇다니까, 글쎄!” 눈꼬리 여자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세상에 죽어도 못하는 게 어딨고 죽어도 꼭 해야 하는 게 어딨냐고 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콕 집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아주머니? 살다 보면 죽어도 이건 못 하겠다 죽어도 이건 해야겠다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죽어도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런 건 없다 생각하니까 못 올 것도 없겠다 싶더라고요.”
그들은 이제 그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그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그녀 쪽에 서 그들에게 부쩍 관심이 생겼다. 그녀는 그들의 얘기 속에서 큰고모님 부부와의 친교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애썼지만 대화 내용이 워낙 요령부득이라 쉽지 않았다.
그들은 정해진 순서라도 있는 듯 돌아가며 얘기를 했다. 우선 노파가 옛이야기 책에나 나올 법한 희한한 질병에 관한 얘기를 하자, 뒤를 이어 눈꼬리 여자가 얼마 전에 신문에 보도된 유괴사건 얘기 를 했다. 마지막으로 가운데 여자가 남자의 지독한 바람기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얘기가 한 바퀴 돌자 다시 노파가 쥐나 벌레를 이용한 민간요법적인 처방을 줄줄 늘어놓았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는 이를 갈며 우리나라 경찰의 무능함을 개탄했다.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도 가운데 여자가 조용히 뜨개 질만 하는 바람에 실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애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기가 몇이야?” “하나요.” “하나? 아들이겠군.” 노파가 끼어들었다. “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삼학년이에요.” “우리 막내 손주보다 한 학년 위군.”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무슨 선서라도 하듯 엄숙하게 말하더니, 살아있다면, 이라고 덧붙였다. 이말을 신호로 노파는 신들린 듯 만능 고약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는 낮게 염 불인지 주문인지를 외웠고, 삼십대 여자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콧물을 훔칠 때 빼고는 양손으로 빠르게 뜨개질을 계속 했다. 그녀는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기 운을 감지했다. 그것은 꿀이나 잼처럼 끈적하게 조이고 당겨오는 불행의 인력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슬픈 리듬을 띤 환상성을 갖고 있어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었다. 갑자기 노파 가 쉰 소리로 툴툴거렸을 때에야 그녀는 긴 몽상에서 깨어났다.
“되게 더디네, 거참.” 눈꼬리 올라간 환갑 여자가 대꾸했다. “먼저 온 손님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에요.” “누구든 사연이 많겠죠.” 어느새 울음을 그친 삼십대 여자가 받았다. “목이 칼칼하네.” “자판기라도 하나 마련해두지 않고서.” “그러게 말이에요.” 그녀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안에 자동판매기를 들여놓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때 커튼 너머에서 현관문이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 아갔다. 그녀의 고개도 돌아갔다. 킁킁거리면서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훨쩍 열리더니 그녀 의 큰고모부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큰고모부의 흐릿한 눈빛에 서 그녀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느꼈다. 큰고모부는 입에 이쑤시개를 문채 그곳에 앉은 여자 들을 내려다보았다. 노파가 고개를 까딱하며 그녀에게 그랬듯이, 이쪽으로 와 앉으셔, 라고 말했다. 큰고모부는 그 말은 무시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뭐들 보러 오셨나 본데...” 큰고모부는 안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은 아직도 자나?” 큰고모부는 다시 그들을 향하더니 가볍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철학관 오셨으면 한 층 더 올라가시오.”
“네에? 여기가 아니라고요?” 세 여자가 동시에 일어섰다. 가운데 여자의 알록달록한 치마에서 실뭉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보면 모르십니까? 여긴 가정집이오.” 노파가 다시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벗어놓았던 버선을 꿰며 말했다. “아이고. 다들 가정집 같은 데다 신단을 꾸미고들 하니까 여기도 그런 줄 알았지.” 큰고모부는 천천히 이를 쑤시면서 말했다. “그놈의 콩꼬투리만 한 철학관 딱지를 떼고 당장 큼지막하게 새로 만들라고 하든지 해야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세 여자들을 따라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초인종 옆에 붙 은 빨간 딱지 속에서 자신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다. 철학관 딱지에는, 기 미 낀 여자가 “이름 보고 남자인 줄 알았어요” 했던 남자 이름 석 자가 ‘도사'라는 글자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글자 아래에 위쪽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있었는데 그 가느다란 선이 세 여자의 원성을 샀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고 그녀는 계단을 내려왔다. 옥탑방 도사는 자신이 왕고모님으로 불린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녀는 세 여자가 왕고모님 도사에게 어떤 선물을 받으러 가는지 알 수 있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을 때마다 그녀는 뭔가에 들씌운 듯 중얼중얼 빌고 또 빌었다. 희귀병을 앓는 친지의 완쾌를, 유괴된 손자의 생사를, 바람난 남편의 귀가를, 자식을 앞세운 뒤 늙어가는 부부의 평안과 명 랑을 빌었다. 그녀가 타인을 위해 뭔가를 이토록 절박하게 빌어본 적은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다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 것뿐인데, 삼층 큰 고모님 댁에 무거운 잼 단지만이 아니라 그녀를 그녀이게 만들었던 본성의 작은 칩마저 함께 두고 온 듯했다.
그때 뵈었던 큰고모부님이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난달에 그녀는 큰고모님이 돌아가셨다 는 연락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연사라는 사실이었다. 큰고모부가 자살한 지 일 년 만이었 다. 기일은 하루 차이였다. 아들이 죽은 뒤로 늘 기운이 없고 비몽사몽이라 남편 점심 한번 제대로 차려준 적 없던 큰고모는 남편의 첫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장을 보러 나셨다. 갑작 스레 몰아닥친 늦추위에 꽁꽁 언 채 삼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와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고모는 몸을 녹 일 셈으로 뜨거운 물을 마셨다. 그게 화근이었다. 큰고모는 뜨거운 물을 삼킨 순간부터 끙끙 앓다 그 날 밤에 돌아가셨다. 생전의 큰고모부가 점심때마다 내려가 식사를 하곤 했던 일층 돼지갈비집 주인 여자가 임종을 지켰다. 큰고모의 마지막 유언은, 그때 찬물을 먹었어야 했는데, 였다고 했다. 그리고 삼층 건물은 그녀에게 상속되었다.
그녀의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이 얘기를 듣는 데 서너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안동소주 한 병과 셀 수 없이 많은 맥주병을 비웠고 이십분 간격으로 번갈아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누가 물어 온다면 나는 다만 그녀의 얘기의 개요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야기에서 개 요란 얼마나 허망한가. 우중충한 공예품이 가는 솔질에 의해 희끄무레한 먼지를 벗고 세밀한 장식의 윤곽과 색깔을 드러내듯, 인중선이 분명한 그녀의 윗입술에서 흘러나온 찬찬한 묘사는 내게 정오 무 렵 낡은 삼층 건물 가정집 거실에서 일어난 풍경들을 오롯이 드러내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이 정도로밖에는 전달할 수가 없다. 나는 그녀가 낯선 여자들과 마주 앉아 있는 동안 그녀 내부에서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녀 또한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게 무엇이든 어디 보자 하고 덤벼 들면 보잘것없는 것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바꿔놓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술집을 나올 때 나는 그녀가 이미 계산을 마쳤다는 걸 알았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한 내가 술값을 내도록 해주는 게 도리였다. 내 표정에서 비난의 기미를 알아챈 그녀가 피식 웃었다. 피식. 그렇다. 순간 나는 모든 걸 깨달았다. 얼토당토않은 의혹은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큰고모님께서 돌아가 셨다고 말하면서 피식 웃었던 것이다. 나도 피식 웃었지만,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입가에 인 조용한 경련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중얼거렸던 말을 상기했다. 과연, 그녀의 큰고모 님 부부와 나의 인연은 희한했다. 내가 그녀의 사랑을 모른 채 한 여자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실연의 고통을 안고 큰고모님댁 삼층 건물을 방문했고, 내가 그 여자에게 실연을 당하고 삼 년 만에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돌아가신 큰고모님 부부로부터 삼층 건물을 상속받았다. 나는 어쩌면 내 것 이 되었을지도 모를 낡은 삼층짜리 상가 건물을 떠올렸다. 회색 커튼을 쳐놓은 괴상한 현관과 어두운 실내,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벽에 붙어 있었을 빨간 플라스틱 딱지까지 생생했다.
그녀는 주차장 쪽에서 나온 늙은 남자에게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신호 였다. 그녀는 일곱 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의 각도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편안하다면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누구를 만나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자신 에게 가슴이 설레길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너무 먼 어딘가로 초월해버 린 것 같았다. 그녀는 훨씬 더 관대하고 자연스러워졌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를 슬프게 했다. 자신의 소유물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나로부터 그것을 하나하나 빼앗 는 식의 무력한 산수에 골몰했던 스물아홉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때 나는 어쩌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스물아홉의 그녀로 인해 뒤늦은 실연을 앓게 되리라는 생 각을 했다. 너무 늦어 격렬하지는 않겠지만, 격렬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 입술을 피나게 씹어대진 않겠지만, 희미해진 사진 속 윤곽을 더듬듯 손끝이 닳도록 무언가의 테두리를 하염없이 더듬어나갈 만짐의 세월이 시작되리라는 예감이었다. 그 예감은 지난 2월 내가 이 술집을 찾아든 순간 적중했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 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 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연령의 절반을 꼭짓점으로 하여 직각으로 꺾이는 형태라면, 그녀의 인생은 앞쪽이 다소 높은 산의 능선처럼 삼분의 일 지점에서 봉우리를 이룬 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형태일 것이다. 누구 에게나 개인적인 멜로디가 있다. 이십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 게 보내온 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 와 무관한, 그녀의 희한한 개성으로 간주했다. 스물아홉의 봉우리에서 그녀는 너무 일찍 철들었고 다 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버렸다. 낡은 삼층 건물의 어둑한 실내에서 그녀가 낯선 여인들을 통해 본 것은 그녀의 미래가 그리는 능선이었을까. 삼 년 전 그녀는 이미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작은 노랫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여자의 새된 노래에 혹한 내 귀의 어두움에 서 비롯된 일이었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런데 희한한 건 그녀의 큰고 모님 부부와 나의 질긴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옥상에 옥탑방을 얹은 낡은 삼 층짜리 건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며 가벼운 실수나 후회거리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때 찬물을 먹었어야 했는데. 헤어지기 전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괜찮지?” “괜찮네.” 물론 기차처럼 긴 술집에 대한 품평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내가 겪고 있는 실연 의 고통이 서서히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는 대답을 되풀이하면 서, 그녀가 자꾸 나의 안부를 묻고 나는 그것에 괜찮다고 대답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제 모든 것은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나는 기차간 모양 의 술집 분위기를 내는 이 단골 술집에 혼자 앉아, 맞아 그때 그런 얘길 했었지라든가 왜 그랬을까 그녀는,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 그녀가 했던 얘기들, 그녀의 피식 웃던 표정, 그녀의 단정한 인 중선과 윗입술을 떠올린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 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