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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30 - 김홍희 “방랑”

Episode 30 - 김홍희 “방랑”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김영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어느새 여름입니다. 날씨도 덥고요, 습도도 높습니다. 여름. 네, 여름 좋죠. 여름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요, 또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여름철이 되면 여행서들도 많이 나간다고 그러죠?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실용적인 필요에서 어, 가이드북 같은 것을 사시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고 그냥 여행 가서 읽을 책을 고르는 분들도 계시겠죠. 네 저의 경우에는 그 제가 갈 도시나 그 나라가 배경인 그런 소설을 보통 고르는 편입니다. 제 집에 앉아서 읽을 때는 잘 이해가 안 되던 것들도 그, 막상 그 도시에 도착해서 읽으면 쏙쏙 잘 들어오고요. 아 여기가 여기구나. 또 이래서 이런 얘기들이 들어가는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 음식이 이런 맛이구나, 라는 것을 좀 입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서 제가 인제 좋아하는데요. 네, 뭐, 꼭 그렇게 에, 하나하나 매치시키지 않더라도 여행지에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것도 여행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도 기본적으로 하나의 여행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서, 어딘가로 가는 거죠. 그것은 막 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의 언덕일 수도 있고, 그리고 저- 어디 남태평양의 어딘가 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 데를 갔다가 오는 경험인데, 여행을 가서 그곳이 배경이 아닌 다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 중에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죠. 뭐… 그런 것도 좀 특이한 경험이고 그래서 그 여행지와 그 책이 강하게 결부돼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 드릴 책은요, 제목이 방랑 입니다. 방랑. 어딘가를 정처 없이 떠돈다는 뜻의 방랑인데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딘가로 좀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가서 뭔가를 경험하고 싶다. 인생을 몸으로 느끼고 싶다 이런 그, 생각이 드는 그런 책입니다. 여행지에 가서 읽기에 그렇게 적합한 책은 아닌 것 같고, 저의 개인적인 취향입니다만 집에서 혼자 이제 읽어 보면서 나의 지난 여행 또는 혹은 앞으로 겪을 여행들을 생각하기에 좋은 그런 책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 책은 김홍희라는 사진가의 산문집입니다. 이 사진가들 중에서 글을 쓰는 분들이 꽤 됩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직종보다 좀 많은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른 예술 장르보다. 근데 사진가들께서 쓰신 글 중에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런 글입니다.

글은 그렇게 분량이 많진 않습니다. 책의 또 상당 부분은 사진이 들어있고요, 그 중간중간에 글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김홍희 씨의 글은 읽어보면 대단히 어, 정제돼있고 단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분명히 상당한 수준의 독서량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저는 짐작을 하고 있고요, 이 보통 아마추어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글을 쓰시지 않는 다른 업종에 계신 분들이 산문을 쓸 때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글이 쓸데없이 말하자면 좀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네, 줄이고 압축하고 또 정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실은 알기 힘든데요. 어쩌면 이분은 사진을 찍기 때문에 어, 글을 쓸 때에도 어떤 사진을 찍을 때 적용하는 자신의 어떤 미학적 원칙들을 자기도 모르게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진이라는 것은 가능하면 프레임 안에서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그러죠? 그림은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뭔가를 이제 그려 넣는 것 이죠. 근데 사진은 가능하면 뺍니다.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는걸 보면 어, 뭐… 주제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작가를 찍는다고 하면, 어, 그 작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놔두죠. 예를 들면 펜이라던가 종이라던… 이런 것은 놔두지만 예를 들면 거기에 뭐 그닥 필요치 않은 휴대폰이 있다거나, 아니면 뭐 시계가 있다거나 이러면 그런 건 빼자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걷어 내는 것이 사진가의 일인데 그런 어떤 사진가로서의 그 삶의 자세 같은 것이 이 글쓰기에도 나타난 게 아닌가 그런 추정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제가 그, 뭐 저는 그, 이런 다른 어…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의 산문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소설가로서 모든 삶을 경험해 볼 순 없기 때문에, 그분들이 쓰신 글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구체적이고 또 살아있는 인물들이 등장할 때, 여기서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뭐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캐릭터가 살아있는 인물들이 보일 때, 아주 좀 빠져드는데요. 서양에는 그 평전이라던가 전기문화 자서전 이런 것들이 아주 발달해 있어서 소설가들이 거기에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거나 아니면 죽은 뒤에 또는 살아생전에도 전기 작가에 의해서 삶이 그 기록되게 되는데요. 이런 것은 그, 이 삶을 다시 한 번 가공해야 하는 소설가들에게 중요한 어떤 자산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사실은 이런 전기라던가 평전 문화가 그렇게 발달해있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든 간에, 저는 기록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구요. 얼마 전에 그 어, 유명한 친일파 매국노죠,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왜냐하면 그 역사적 격변기에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그런 결정을 내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런 판단을 강제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이런 것은 소설가인 저에게는 매우 중요하구요. 딱히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인생이라는 것은 많은 결정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리고 앞으로 역사가 평탄하리라고 만은 예상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 내린 결정들 보는 것을 저는 대단히 좋아합니다.

근데 김홍인 씨의 그 산문집은요. 방랑, 이것은 물론 거기에는 상당히 많은 어떤 자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아무래도 자기에 집중하게 되는 그런 존재들이라서 그런지 예술가들이 쓴 산문집에는 자기가 어떻게 예술가가 되었는가, 또 그것을 어떻게 이 어려움을 뚫고 견지해 갔는가, 그런 얘기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김홍희 씨 산문집의 좀 특이한 점은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옮겨놓은 부분이 상당히 탁월합니다. 저는 그 부분을 역시 더 좋아하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혹시 그 자기 인생을 기록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독자들도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보다는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냉정한 시선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서술함으로써 역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 매우 중요한 글쓰기의 어떤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또 어떻게 보자면 정직하게 한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어려서부터 형제, 자매, 뭐 부모,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그들을 통해서 또는 그들의 모습 속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한 인간의 캐릭터 인격이 구축되는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쓸 때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나르시시즘에 빠지기가 쉽구요. 그래서 사실은 남의 얘기를 오래 들어주는 것 남이 자기얘기를 하는 것을 오래 들어주는 것은 어… 네, 돈 받고 해야 되는 일이죠 그거는. 그냥 네, 돈을 주고 하기에는 좀 아까운 일이 될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 일단 그럼 사진가 김홍희 씨의 글을 한 대목을 읽어 보고요, 계속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삼촌 삼촌이 죽었다. 나보다 겨우 네 살 많은 삼촌. 무슨 환장할 업보를 타고났던지. 평생을 춤추듯 온몸을 흔들고 산 절름발이 육신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렇게 먹지 말라는 소주를 밥 삼아 안주 삼아 먹더니, 황달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할 때도 간염에 걸려 사경을 헤멜 때도 손에서 뗄 줄을 몰랐던 소주병 다 놓아두고 가버렸다. 살아온 인생 겨우 마흔하나에. 니 삼촌이 죽었어. 아버지께서 주신 짧은 전화에 삼촌 시신을 염하러 들어갔다. 병원 시체보관실에서 꺼낸 시신의 피부는 노란색이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노란색. 죽은 자의 빛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꽉 다문 입. 그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거야. 나는 알지. 삼촌의 죽음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함께 염하는 사람들이 삼촌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펴려고 했다. 펴지지 않는다. 승복을 입은 두 사내가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펴지지 않는다. 본래가 그런 육신이다. 죽은 자의 육신에 난 구멍이라는 구멍은 비밀이라도 새어나올까 봐 밀봉을 해버렸다. 말도 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게 틀어막아 버렸다. 몸을 닦아내고, 홑겹 무명옷을 입혔다. 그리고 나는 머리 쪽을 혼자 들고 두 스님은 다리 쪽을 들어 관에 넣었다. 주검과 관 사이 빈 공간에는 둘둘 말린 휴지를 꼭꼭 채워넣었다. 넌 움직이면 안 돼,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너야. 하라는 대로 해. 이렇게 강요했다. 삼촌의 육신은 우리가 하는 대로 다 받아들였다. 좋아, 이제야 너희들 것이다. 맘대로 다뤄봐. 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염을 마치고 나온 나에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 삼촌은 자살한 겁니다. 삼촌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얼음보다 차가운 분노로.

삼촌이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부산으로 온 것은 국민학교 4학년 경이었다. 겨우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중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대신 여름이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교문 앞에서 나무로 만든 파란 아이스케키 통에 걸터앉아 아이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겨울에는 영어 책 대신 집 앞 사거리 한 모퉁이에서 붕어빵 빵틀 열기로 허벅지가 시퍼러죽죽 열멍이 다 들도록 빵틀을 돌렸다. 삼촌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았고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사업도 해보고 결혼도 했다. 이제 지상에 남긴 것이라고는 절름발이 육신과 신기 든 아내,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열심히 나가던 교회도 어느 날 딱 끊고 소주병에 신앙을 심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죽였다. 완벽하고 치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내 나이 마흔넷, 가끔 홀로된 시간이면 아무도 몰래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삼촌의 자살을 함께 꿈꾸며. (음악)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자기보다 한 네 살 위의 삼촌, 이라면 사실은 형제간 같은 그런 사이죠. 어, 불구였기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질 못했구요, 지금은 뭐 상황이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불과 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대학교도 가지 못하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가 좀 어이가 없는데요. 네 그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이셨던 장영희 선생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였는데 어, 학교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돼 있지 않다며 장애인을 받지 않는 겁니다. 네 좀 어이없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하면 되는데, 몇 명 안 되는 장애인을 위해서 그런 큰돈을 들일 수 없다며 안된다고 많은 명문대학들이 거절을 했다고 그러죠? 네. 지금은 어 많이 상황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네 이 삼촌이라는 글은 삼촌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을 하고요, 그 염을 할 때의 그 삼촌의 그 펴지지 않는 그 몸에 대해서 네 마치 사진으로 찍듯이 어…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 다음에 읽을 글은요, 제가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그 이 김홍인 씨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가서 일본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배웠겠죠? 네 근데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 선생님들은 일종의 아직도 그 장인적인, 또 장인과 도제관계 같은 그런 문화를 강하게 가지고 있구나 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됐는데요, 네 단순히 뭐 제자를 사랑하는, 그런 선생님, 은 많죠. 그런 선생님에 대한 글은 뭐 사방에 그냥 많이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김홍인 씨가 일본에서 만났던 이 선생님은 네 이렇게 뭐 제자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준다거나 아니면은 뭐 재능을 발견해 가지고 그것을 일깨워준다거나 하는 그런 어… 그런 스승이 아닙니다. 매우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구요. 그 캐릭터로, 네 자기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면서 제자에게 어, 예술가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는 그런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음악)

마쓰자키 선생 마쓰자키 선생의 시간약속은 언제나 특별했다. 세시면 세시지 항상 세시 십칠 분이라던가 열두 시 이십삼 분, 일곱시 육 분, 이런 식이었다. 새 학기 첫 강의시간에 들어온 그는 선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포츠형보다 더 짧게 쳐올린 삼부가리에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으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출석부를 강의실 테이블에 탁 던져올리면서 마흔 명이 넘는 우리를 휘 둘러보더니 다짜고짜 강요했다. “훌륭한 사진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봐라.” 누군가 학생 하나가 손을 들자 여기저기서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선생은 손을 든 학생들을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겨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학생들이 앞으로 나가자 앉아있는 학생들과 마주 보게 세웠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으로 그는 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말 한마디에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짧은 머리는 야쿠자, 라는 등식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이십 년이 넘게 학교 강의를 했지만 훌륭한 사진가가 되겠다고 공언한 학생 중에 그렇게 된 학생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너희들에게 속고 싶지도 않고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앞에 서 있는 학생들은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조용히 강의실 밖으로 나가라.”

그는 완고했다. 칠판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학생들이 다 나가기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에 선 학생들은 그의 무관심과 단호로 일관한 태도에 더 이상 관용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십여 명의 학생들이 다 나가버리자 그는 다시 물었다. “우리는 지금 5층에 있다. 모기가 날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을 물고 있다. 어떻게 할래?” 그는 손가락 끝으로 한 학생을 가리켰다. “너, 말해봐.” 우물쭈물하자 그는 여지없이 학생을 밀어냈다. “나가.” 그렇게 여러 학생이 떼밀려 나갔다. 강의실 안은 살얼음판이다. 우리는 떼밀려 나가지 않으려고 온갖 머리를 굴렸다. 어느 정도 답을 할 준비가 되면 그는 어느새 질문을 바꿔버렸다. “지금이 몇 월인데 모기가 날아다닌단 말이야. 너, 하루 몇 시간 사진에 대해 생각하지? 너 말이야.” 그의 손가락 끝은 냉정했다. 바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손가락 끝으로 학생을 강의실 밖으로 밀어냈다. 아무도 거부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학생들은 반 이상 줄었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그 사람을 다 가리는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너, 하루 스물 네 시간,” 마쓰자키 선생은 순간 멈칫했다. 바로 질문이 바뀌었다. “너희들은 수영을 잘한다. 강에 사람이 떠내려간다. 아직 살아있다.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래? 너!” 내 앞자리 학생이 머뭇거리자 여지없이 밀어낸다. “너!” 산발적으로 날아다니는 그의 손가락 끝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로선 생각을 가다듬어 본 적이 없는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카메라를 내던지고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밀려나고, 사진을 찍고 난 뒤 구한다고 해도, 밀려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생각해보겠다는 학생들은 완전히 바보취급을 당하며 밀려났다. 그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학생들의 뒤통수에 꽂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갑자기 칼끝이 내 눈을 가리켰다. “사진을 찍고 말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잘난 사진을 찍고 있어?” 도마에 오른 고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마쓰자키 선생은 분명 우리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넌 잔인한 놈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분명 너를 잔인한 놈으로 낙인 찍을거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럴 수 있어? 넌 잔인한 놈이야.” 그는 집요했다. 몇 남지 않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우리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찍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대라.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넌 살인자야. 정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외에는. 답을 알기는 알겠지만 말로 할 수 없다는 변명을 들이대었을때 그는 노기를 띠면서 몰아붙였다. “아는데 말을 못해? 니가 니 엄마를 아는데 엄마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불러.” 난감하다. 천하에 잔혹한 질문이다. 마쓰자키 선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세 시간 짜리 수업을 한 시간도 안 하고 마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남으라고 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선생은 의외였다는 듯이 나에게 술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한창 시절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밤을 샐 수 있는 나였다. “오늘 밤 고르덴가이 와라지에 일곱 시 육 분까지 오게.” 마쓰자키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고르덴가이는 어디며 또 와라지는 어딘지. 일곱 시 육 분은 또 뭔가. 우여곡절 끝에 시간에 늦지 않고 와라지의 문을 열었을 때 마쓰자키 선생은 이미 취해서 앉아있었다. “너하고 나하고 선생과 학생이 된 것은 운명이다. 스승과 제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나를 넘어서지 않고는 감히 스승과 제자가 될 수 없다. 나를 무참히 밟고 넘어서라. 그것이 너의 몫이다.” 선생은 나한테 한 말인지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 당시 나로서는 알 수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취했고, 밤이 깊도록 와라지에서 술을 마셨다.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고백 마쓰자키 선생이 한국에 왔다. 퀭한 눈에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가 검어질 대로 검어진 걸로 보아 지병인 당뇨가 걷잡을 수 없이 수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마쓰자키 선생이 한국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오면 가까운 호텔에서 이삼일 정도 잠시 머물다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아내와 내가 선생을 집으로 모셨다. 내가 평소에 마쓰자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던 관계로, 아내도 선생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병환 중의 선생을 위해, 아내는 헌신적으로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했다. 선생의 음식에 대한 요구는 다양했다. 짜면 안된다, 소금은 더더욱 안된다, 설탕도 안된다,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생선이 먹고 싶다, 일본식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 우리는 조금도 선생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식사 후 선생은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워물었다. 세상에 맛있는 것이 담배 이상 뭐가 있겠느냐는 듯이 연기를 뿜어대는 그의 모습에서 생에 대한 애착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막 태어난 딸이 하나 있었다. 강보에 싸여 놀고 있는 딸아이 옆에서 마쓰자키 선생은 예사로 담배를 피웠다. 심지어는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불며 아이가 손까지 다 감싼 베넷 옷으로 얼굴을 비벼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선생님! 담배는 베란다! 아이에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 고함을 치면 선생은 알았다 알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문 채 베란다로 가는 척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피우던 담배를 다 피우곤 했다. 그런 선생이 내 집에서 먹고 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한 달 정도를 머물렀다. “니가 만약에 니콘 살롱에서 초대전을 하던지 태양상을 받든지 하면 내가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 언젠가 와라지에서 선생과 술을 마시며 사진 일자리를 얻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선생의 답은 냉담했다. 니콘 살롱은 현역으로 현장에서 십 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전시를 할까 말까 한 곳이다. 학생의 신분으로는 어림 없는 곳이다. 태양상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실력을 키워라, 그러면 내가 적당한 시기에 너의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 는 따뜻한 한마디가 내게는 더 절실한 시기였다. 그의 사진 학교 1학년 겨울방학 동안 나는 동경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말 그대로 나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사진에만 몰두했다. 자면서도 꿈속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신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아침 니콘 살롱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모에 통과해 오는 5월, 신주쿠 니콘 살롱에 전시 일정을 잡아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바로 마쓰자키 선생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선생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저녁에 와라지에서 보자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와라지에서 만난 선생은 축하한다는 한 마디 외에는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선생의 답을 기다리던 내가 용기를 내어 일자리 얘기를 하려 하자 마쓰자키 선생이 날 보며 하는말이 “소도 뒷걸음질하다 줄을 잡는 수가 있다. 니콘 살롱에서 전시 한번 하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니가 세 번 전시를 한다면 내가 두말하지 않고 일자릴 알아봐 주겠다.” 나는 들었던 술잔을 그 자리에 딱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라지를 나와버렸다. 아무리 선생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밤새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배신감이 들어 두 번 다시 선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 나를 불러내 술친구를 삼던 선생에게서도 일체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난 어느 날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사십사 분에 강담사 정문 앞에서 보자. 카메라를 들고 나와라.” 선생은 간단하게 자기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담사는 어디 있으며 카메라는 왜 챙기라고 하는지. 머릿속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직감했다. 일거리다. 놓칠 수 없는 기회. 마쓰자키 선생은 솜씨를 두 번 요구하지 않는다. 한 번으로 끝이다. 멋진 일자리를 얻느냐, 다시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느냐는 내일 하루에 달렸다. 솜씨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그날 빌려온 친구의 카메라를 밤을 설쳐가며 손에 익혔다. 당시 나는 니콘 FM2 라는 카메라 한 대와 35미리 렌즈 하나밖에 없었다. 강담사까지는 지도를 들고 전철을 확인해가며 벌써 한번 다녀왔다. 내일 아침에 시간에 맞춰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취재 현장에서 촬영을 하는 동안 마쓰자키 선생은 일체 말이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주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조했고,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내 카메라와 빌린 친구 카메라로 같은 장면을 중복해서 찍었다. 혹시 카메라가 고장이 날지 모른다는, 고장이 나더라도 어느 카메라건 한 쪽에는 꼭 사진이 찍혀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한치의 긴장도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취재가 끝난 저녁, 파김치가 되어 암실에서 프린트를 해 가지고 나왔다. 마쓰자키 선생은 사진은 보지도 않고 위층의 편집실로 가지고 갔다. 얼마 후 돌아온 선생은 와라지로 가자고 했다. 가는 동안 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바늘방석이었다.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매 맞는 아이보다 매를 기다리는 아이가 더 공포에 떤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게다. 와라지에서 몇 잔 술을 연거푸 드신 선생은 초조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데스크에게 다음 일을 너에게 맡겼다.” 선생의 입가에 아주 짧게 웃음이 번지는 듯했다. 반년 이상을 선생과 술을 마셨지만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잘해봐라.” 선생은 자신의 술잔으로 내 술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쓰자키 선생은 포토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는 자유기고가로서 초일류의 카메라맨을 마음대로 선별해서 쓸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마쓰자키 선생이 인정했다. 너무도 기쁜 일이었지만 나도 어느새 마쓰자키 선생처럼 냉정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내 집에서 한 달을 머문 마쓰자키 선생은 어느 날 아침 이혼한 아내가 있는 뉴욕으로 가겠다며 갑자기 짐을 챙겼다. 짐이라 해야 수건 몇 벌과 대학노트 몇 권이었다. 그리고는 바래다 드리겠다는 우리를 뿌리치고 혼자 택시를 타고 휑하니 가버렸다. 본래 그런 선생이다. 당황해 하는 아내에게 나는 이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선생은 어제 저녁 나를 앉혀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알다시피 니가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하지만, 너만큼 찍는 카메라맨은 세상 어디를 가나 수두룩하다. 기획이 구십, 사진은 열이다. 냉정하게 세상을 보고 깊은 철학의 잣대를 가지고 우선 생각을 해라. 사진을 찍기 전에 찍는 너와 찍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파악해라. 충분히 그러고 난 뒤 확신이 서면 그때 그것을 인화지에 옮겨라. 그게 사진가다. 사진가란 사상가다. 카메라란 니 사상을 옮기는 연필 같은 도구다. 철학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저 찍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국 남에게 휘둘린다. 내가 너에게 일본어로 기사를 쓰게 한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너는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한다. 나를 무참히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또 누군가에게 기댈지 모른다. 이전에 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런 날이 가깝게 온 것 같다.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천상천하에 혼자 설 기회를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라.”

그런 날이 닷새가 지난 새벽에 왔다. 내 집에서 가까운 특급호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마쓰자키라는 일본 사람이 체크아웃을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전화를 하면 해결해줄 것이니 전화를 하라고 해서 이렇게 새벽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모진 것이 정인데 마쓰자키 선생의 가르침은 너무도 혹독했다. 선생은 왜 나와의 인간관계까지 시험대에 올리면서 홀로서기를 가르치고자 했을까. 나는 호텔 측에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혹시 정말로 돈이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가. 뉴욕에 간다는 선생이 호텔에서 닷새 동안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견딜수가 없었다. 바쁘게 차를 몰아 그 호텔 프론트로 갔지만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마쓰자키 씨는 현금으로 다 계산하고 약 30분 전에 체크아웃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쓰자키 선생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동경과 뉴욕에 전화를 해도, 전화번호도 다 바뀌어버렸다. 죽음을 앞둔 선생이 내 집에 왔었다. 제자에게 이토록 뼈아픈 고백을 하게 해놓고, 그리고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음악)

네 잘 들으셨습니까. 이 마쓰자키 선생이라는 분 대단하죠. 네, 옛날에 일본에서 가르쳤던 제자의 한국 집에 와서 네 그 아파트에서, 갓난애기한테 담배 연기를 뿜어대면서 한 달이나 버티면서, 이거 먹고 싶다 저거는 싫다 그러면서 네, 괴롭히고, 또 뉴욕에 간다더니 웬 특급호텔에 가가지고 오일 동안이나 지내고 프론트에게 시켜 가지고 호텔비 내라 그러구요. 네, 네 어떤 이 지독함이 있습니다. 네 일본이 참 좋은 사진가를 참 많이 배출했는데요. 네 이 마쓰자키 선생, 같은 분 이런 장인들, 네 어떻게 사진을 배웠는지,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지 좀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요? 네… 이 신주쿠에 있는 니콘 살롱은 저도 가본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이 카메라 회사들은 니콘 살롱, 뭐 펜탁스 뭐, 갤러리 인가요? 뭐… 하여튼 이런 펜탁스, 니콘, 하여튼 후지, 이런 카메라 또는 필름 브랜드들은 일종의 그 쇼룸으로써, 일본의 회사들은 쇼룸의 전통을 강하게 갖고 있죠? 이.. 그 좋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갤러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네, 이제 학교 갓 들어온 학생보고 일자리 좀 달라고 했더니 니콘 살롱에서 전시를 하면 일자리를 주겠다는 둥 뭐 이러면서 네… 그 절대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몰아가는 이 마쓰자키 선생,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에 이 서울에 있는 이 김홍희 씨를 찾아오고 네 여기서 생전에 알던 사람들 그것도 제자를 또 어디론가 찾아갔겠죠.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 네 이런 것도 마치 일본 소설가의 어떤 작품을 보는듯한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일본적인 허무, 니힐, 이런 것들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글이었습니다.

이 방랑, 이 산문집 보시면요. 앞부분에 이 김홍희 씨가 일본 가서 막 고생한 얘기 나오거든요? 네 그런 사전의 맥락을 알고 계시면 이분이 그 마쓰자키 선생한테 네 얼마나 절박하게 일자리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좀 더 절절하게 느끼실 수 있을텐데요. 어쨌든 오늘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사진가의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네 오늘 팟캐스트 시작하면서 어 여행 얘기로 운을 뗐는데요. 이런 김홍인 씨의 산문집 방랑은 딱히 읽고 나면 여행을 떠나고 싶기 보다는요, 뭔가 쎈 것과 부딛히고 싶다, 이런 열망을 이렇게 좀 불러일으키는 책입니다. 뭔가 고생도 진하게 하고 싶고, 그리고 어딘가에 가서, 정말 지독한 사람, 쎈 사람과 이렇게, 맞부딪히면서 어… 정말 인생 그 자체를 겪고 싶다. 네,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자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Episode 30 - 김홍희 “방랑” Episode 30 - Honghee Kim "Wanderlust"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김영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How were you. 네 어느새 여름입니다. Yes, it's summer. 날씨도 덥고요, 습도도 높습니다. The weather is hot and the humidity is high. 여름. 네, 여름 좋죠. 여름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요, 또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여름철이 되면 여행서들도 많이 나간다고 그러죠?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실용적인 필요에서 어, 가이드북 같은 것을 사시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고 그냥 여행 가서 읽을 책을 고르는 분들도 계시겠죠. 네 저의 경우에는 그 제가 갈 도시나 그 나라가 배경인 그런 소설을 보통 고르는 편입니다. 제 집에 앉아서 읽을 때는 잘 이해가 안 되던 것들도 그, 막상 그 도시에 도착해서 읽으면 쏙쏙 잘 들어오고요. 아 여기가 여기구나. 또 이래서 이런 얘기들이 들어가는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 음식이 이런 맛이구나, 라는 것을 좀 입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서 제가 인제 좋아하는데요. And that's why these stories come in, and the food in this novel tastes like this. 네, 뭐, 꼭 그렇게 에, 하나하나 매치시키지 않더라도 여행지에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것도 여행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도 기본적으로 하나의 여행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서, 어딘가로 가는 거죠. 그것은 막 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의 언덕일 수도 있고, 그리고 저- 어디 남태평양의 어딘가 일 수도 있는 것이죠. It could be just the wind, the hills of storms, and it could be--somewhere in the South Pacific. 그런 데를 갔다가 오는 경험인데, 여행을 가서 그곳이 배경이 아닌 다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 중에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죠. It's an experience that comes from going to such a place, and going on a trip and reading a novel that's not in the background is what makes you go on a trip. 뭐… 그런 것도 좀 특이한 경험이고 그래서 그 여행지와 그 책이 강하게 결부돼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 드릴 책은요, 제목이 방랑 입니다. 방랑. 어딘가를 정처 없이 떠돈다는 뜻의 방랑인데요. It's a wandering meaning to wander around somewhere.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딘가로 좀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가서 뭔가를 경험하고 싶다. I want to go and experience something. 인생을 몸으로 느끼고 싶다 이런 그, 생각이 드는 그런 책입니다. 여행지에 가서 읽기에 그렇게 적합한 책은 아닌 것 같고, 저의 개인적인 취향입니다만 집에서 혼자 이제 읽어 보면서 나의 지난 여행 또는 혹은 앞으로 겪을 여행들을 생각하기에 좋은 그런 책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 책은 김홍희라는 사진가의 산문집입니다. 이 사진가들 중에서 글을 쓰는 분들이 꽤 됩니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직종보다 좀 많은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른 예술 장르보다. I feel like a little more than other occupations, than other art genres. 근데 사진가들께서 쓰신 글 중에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런 글입니다.

글은 그렇게 분량이 많진 않습니다. The writing is not that large. 책의 또 상당 부분은 사진이 들어있고요, 그 중간중간에 글이 들어있습니다. Another large part of the book contains pictures, and there are texts in the middle. 그런데 이 김홍희 씨의 글은 읽어보면 대단히 어, 정제돼있고 단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분명히 상당한 수준의 독서량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저는 짐작을 하고 있고요, 이 보통 아마추어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글을 쓰시지 않는 다른 업종에 계신 분들이 산문을 쓸 때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글이 쓸데없이 말하자면 좀 길어진다는 것입니다. 네, 줄이고 압축하고 또 정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실은 알기 힘든데요. 어쩌면 이분은 사진을 찍기 때문에 어, 글을 쓸 때에도 어떤 사진을 찍을 때 적용하는 자신의 어떤 미학적 원칙들을 자기도 모르게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진이라는 것은 가능하면 프레임 안에서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그러죠? 그림은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뭔가를 이제 그려 넣는 것 이죠. Drawing is to draw something on the blank paper and draw something now. 근데 사진은 가능하면 뺍니다.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는걸 보면 어, 뭐… 주제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작가를 찍는다고 하면, 어, 그 작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놔두죠. When you see the photographers working, uh, well... Things that don't seem to be related to the subject. For example, if you're photographing an artist sitting in front of a table, uh, let's leave things that can express the artist well. 예를 들면 펜이라던가 종이라던… 이런 것은 놔두지만 예를 들면 거기에 뭐 그닥 필요치 않은 휴대폰이 있다거나, 아니면 뭐 시계가 있다거나 이러면 그런 건 빼자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걷어 내는 것이 사진가의 일인데 그런 어떤 사진가로서의 그 삶의 자세 같은 것이 이 글쓰기에도 나타난 게 아닌가 그런 추정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제가 그, 뭐 저는 그, 이런 다른 어…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의 산문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소설가로서 모든 삶을 경험해 볼 순 없기 때문에, 그분들이 쓰신 글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구체적이고 또 살아있는 인물들이 등장할 때, 여기서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뭐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캐릭터가 살아있는 인물들이 보일 때, 아주 좀 빠져드는데요. 서양에는 그 평전이라던가 전기문화 자서전 이런 것들이 아주 발달해 있어서 소설가들이 거기에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In the West, there are so many things like that, such as biography and biographical autobiography, so novelists get a lot of help there.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거나 아니면 죽은 뒤에 또는 살아생전에도 전기 작가에 의해서 삶이 그 기록되게 되는데요. 이런 것은 그, 이 삶을 다시 한 번 가공해야 하는 소설가들에게 중요한 어떤 자산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사실은 이런 전기라던가 평전 문화가 그렇게 발달해있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든 간에, 저는 기록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구요. 얼마 전에 그 어, 유명한 친일파 매국노죠,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라고 생각을 했어요. Not long ago, when I heard the news about the publication of the uh, famous pro-Japanese traitor, Wan-yong Lee, I thought, I haven't read it, but it's very meaningful. 그 왜냐하면 그 역사적 격변기에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그런 결정을 내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런 판단을 강제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이런 것은 소설가인 저에게는 매우 중요하구요. 딱히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인생이라는 것은 많은 결정들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리고 앞으로 역사가 평탄하리라고 만은 예상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 내린 결정들 보는 것을 저는 대단히 좋아합니다.

근데 김홍인 씨의 그 산문집은요. 방랑, 이것은 물론 거기에는 상당히 많은 어떤 자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아무래도 자기에 집중하게 되는 그런 존재들이라서 그런지 예술가들이 쓴 산문집에는 자기가 어떻게 예술가가 되었는가, 또 그것을 어떻게 이 어려움을 뚫고 견지해 갔는가, 그런 얘기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김홍희 씨 산문집의 좀 특이한 점은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옮겨놓은 부분이 상당히 탁월합니다. 저는 그 부분을 역시 더 좋아하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혹시 그 자기 인생을 기록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독자들도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보다는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냉정한 시선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서술함으로써 역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 매우 중요한 글쓰기의 어떤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또 어떻게 보자면 정직하게 한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뭐 어려서부터 형제, 자매, 뭐 부모,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그들을 통해서 또는 그들의 모습 속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한 인간의 캐릭터 인격이 구축되는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쓸 때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나르시시즘에 빠지기가 쉽구요. 그래서 사실은 남의 얘기를 오래 들어주는 것 남이 자기얘기를 하는 것을 오래 들어주는 것은 어… 네, 돈 받고 해야 되는 일이죠 그거는. 그냥 네, 돈을 주고 하기에는 좀 아까운 일이 될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 일단 그럼 사진가 김홍희 씨의 글을 한 대목을 읽어 보고요, 계속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삼촌 삼촌이 죽었다. 나보다 겨우 네 살 많은 삼촌. 무슨 환장할 업보를 타고났던지. 평생을 춤추듯 온몸을 흔들고 산 절름발이 육신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렇게 먹지 말라는 소주를 밥 삼아 안주 삼아 먹더니, 황달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할 때도 간염에 걸려 사경을 헤멜 때도 손에서 뗄 줄을 몰랐던 소주병 다 놓아두고 가버렸다. 살아온 인생 겨우 마흔하나에. 니 삼촌이 죽었어. 아버지께서 주신 짧은 전화에 삼촌 시신을 염하러 들어갔다. 병원 시체보관실에서 꺼낸 시신의 피부는 노란색이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노란색. 죽은 자의 빛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꽉 다문 입. 그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거야. 나는 알지. 삼촌의 죽음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함께 염하는 사람들이 삼촌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펴려고 했다. 펴지지 않는다. 승복을 입은 두 사내가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펴지지 않는다. 본래가 그런 육신이다. 죽은 자의 육신에 난 구멍이라는 구멍은 비밀이라도 새어나올까 봐 밀봉을 해버렸다. 말도 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게 틀어막아 버렸다. 몸을 닦아내고, 홑겹 무명옷을 입혔다. 그리고 나는 머리 쪽을 혼자 들고 두 스님은 다리 쪽을 들어 관에 넣었다. 주검과 관 사이 빈 공간에는 둘둘 말린 휴지를 꼭꼭 채워넣었다. 넌 움직이면 안 돼,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너야. 하라는 대로 해. 이렇게 강요했다. 삼촌의 육신은 우리가 하는 대로 다 받아들였다. 좋아, 이제야 너희들 것이다. 맘대로 다뤄봐. 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염을 마치고 나온 나에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 삼촌은 자살한 겁니다. 삼촌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얼음보다 차가운 분노로.

삼촌이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부산으로 온 것은 국민학교 4학년 경이었다. 겨우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중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대신 여름이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교문 앞에서 나무로 만든 파란 아이스케키 통에 걸터앉아 아이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겨울에는 영어 책 대신 집 앞 사거리 한 모퉁이에서 붕어빵 빵틀 열기로 허벅지가 시퍼러죽죽 열멍이 다 들도록 빵틀을 돌렸다. 삼촌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았고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사업도 해보고 결혼도 했다. 이제 지상에 남긴 것이라고는 절름발이 육신과 신기 든 아내,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열심히 나가던 교회도 어느 날 딱 끊고 소주병에 신앙을 심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죽였다. 완벽하고 치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내 나이 마흔넷, 가끔 홀로된 시간이면 아무도 몰래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삼촌의 자살을 함께 꿈꾸며. (음악)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자기보다 한 네 살 위의 삼촌, 이라면 사실은 형제간 같은 그런 사이죠. 어, 불구였기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질 못했구요, 지금은 뭐 상황이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불과 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대학교도 가지 못하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가 좀 어이가 없는데요. 네 그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이셨던 장영희 선생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였는데 어, 학교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돼 있지 않다며 장애인을 받지 않는 겁니다. 네 좀 어이없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하면 되는데, 몇 명 안 되는 장애인을 위해서 그런 큰돈을 들일 수 없다며 안된다고 많은 명문대학들이 거절을 했다고 그러죠? 네. 지금은 어 많이 상황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네 이 삼촌이라는 글은 삼촌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을 하고요, 그 염을 할 때의 그 삼촌의 그 펴지지 않는 그 몸에 대해서 네 마치 사진으로 찍듯이 어…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 다음에 읽을 글은요, 제가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그 이 김홍인 씨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가서 일본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배웠겠죠? 네 근데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 선생님들은 일종의 아직도 그 장인적인, 또 장인과 도제관계 같은 그런 문화를 강하게 가지고 있구나 라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됐는데요, 네 단순히 뭐 제자를 사랑하는, 그런 선생님, 은 많죠. 그런 선생님에 대한 글은 뭐 사방에 그냥 많이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김홍인 씨가 일본에서 만났던 이 선생님은 네 이렇게 뭐 제자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준다거나 아니면은 뭐 재능을 발견해 가지고 그것을 일깨워준다거나 하는 그런 어… 그런 스승이 아닙니다. 매우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구요. 그 캐릭터로, 네 자기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면서 제자에게 어, 예술가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는 그런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음악)

마쓰자키 선생 마쓰자키 선생의 시간약속은 언제나 특별했다. 세시면 세시지 항상 세시 십칠 분이라던가 열두 시 이십삼 분, 일곱시 육 분, 이런 식이었다. 새 학기 첫 강의시간에 들어온 그는 선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포츠형보다 더 짧게 쳐올린 삼부가리에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으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출석부를 강의실 테이블에 탁 던져올리면서 마흔 명이 넘는 우리를 휘 둘러보더니 다짜고짜 강요했다. “훌륭한 사진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봐라.” 누군가 학생 하나가 손을 들자 여기저기서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선생은 손을 든 학생들을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겨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학생들이 앞으로 나가자 앉아있는 학생들과 마주 보게 세웠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으로 그는 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말 한마디에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짧은 머리는 야쿠자, 라는 등식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이십 년이 넘게 학교 강의를 했지만 훌륭한 사진가가 되겠다고 공언한 학생 중에 그렇게 된 학생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너희들에게 속고 싶지도 않고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앞에 서 있는 학생들은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조용히 강의실 밖으로 나가라.”

그는 완고했다. 칠판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학생들이 다 나가기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에 선 학생들은 그의 무관심과 단호로 일관한 태도에 더 이상 관용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십여 명의 학생들이 다 나가버리자 그는 다시 물었다. “우리는 지금 5층에 있다. 모기가 날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을 물고 있다. 어떻게 할래?” 그는 손가락 끝으로 한 학생을 가리켰다. “너, 말해봐.” 우물쭈물하자 그는 여지없이 학생을 밀어냈다. “나가.” 그렇게 여러 학생이 떼밀려 나갔다. 강의실 안은 살얼음판이다. 우리는 떼밀려 나가지 않으려고 온갖 머리를 굴렸다. 어느 정도 답을 할 준비가 되면 그는 어느새 질문을 바꿔버렸다. “지금이 몇 월인데 모기가 날아다닌단 말이야. 너, 하루 몇 시간 사진에 대해 생각하지? 너 말이야.” 그의 손가락 끝은 냉정했다. 바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손가락 끝으로 학생을 강의실 밖으로 밀어냈다. 아무도 거부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학생들은 반 이상 줄었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그 사람을 다 가리는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너, 하루 스물 네 시간,” 마쓰자키 선생은 순간 멈칫했다. 바로 질문이 바뀌었다. “너희들은 수영을 잘한다. 강에 사람이 떠내려간다. 아직 살아있다.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래? 너!” 내 앞자리 학생이 머뭇거리자 여지없이 밀어낸다. “너!” 산발적으로 날아다니는 그의 손가락 끝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로선 생각을 가다듬어 본 적이 없는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카메라를 내던지고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밀려나고, 사진을 찍고 난 뒤 구한다고 해도, 밀려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생각해보겠다는 학생들은 완전히 바보취급을 당하며 밀려났다. 그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학생들의 뒤통수에 꽂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갑자기 칼끝이 내 눈을 가리켰다. “사진을 찍고 말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잘난 사진을 찍고 있어?” 도마에 오른 고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마쓰자키 선생은 분명 우리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넌 잔인한 놈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분명 너를 잔인한 놈으로 낙인 찍을거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럴 수 있어? 넌 잔인한 놈이야.” 그는 집요했다. 몇 남지 않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우리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찍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대라.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넌 살인자야. 정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외에는. 답을 알기는 알겠지만 말로 할 수 없다는 변명을 들이대었을때 그는 노기를 띠면서 몰아붙였다. “아는데 말을 못해? 니가 니 엄마를 아는데 엄마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불러.” 난감하다. 천하에 잔혹한 질문이다. 마쓰자키 선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세 시간 짜리 수업을 한 시간도 안 하고 마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남으라고 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선생은 의외였다는 듯이 나에게 술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한창 시절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밤을 샐 수 있는 나였다. “오늘 밤 고르덴가이 와라지에 일곱 시 육 분까지 오게.” 마쓰자키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고르덴가이는 어디며 또 와라지는 어딘지. 일곱 시 육 분은 또 뭔가. 우여곡절 끝에 시간에 늦지 않고 와라지의 문을 열었을 때 마쓰자키 선생은 이미 취해서 앉아있었다. “너하고 나하고 선생과 학생이 된 것은 운명이다. 스승과 제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나를 넘어서지 않고는 감히 스승과 제자가 될 수 없다. 나를 무참히 밟고 넘어서라. 그것이 너의 몫이다.” 선생은 나한테 한 말인지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 당시 나로서는 알 수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취했고, 밤이 깊도록 와라지에서 술을 마셨다.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고백 마쓰자키 선생이 한국에 왔다. 퀭한 눈에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가 검어질 대로 검어진 걸로 보아 지병인 당뇨가 걷잡을 수 없이 수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마쓰자키 선생이 한국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오면 가까운 호텔에서 이삼일 정도 잠시 머물다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아내와 내가 선생을 집으로 모셨다. 내가 평소에 마쓰자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던 관계로, 아내도 선생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병환 중의 선생을 위해, 아내는 헌신적으로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했다. 선생의 음식에 대한 요구는 다양했다. 짜면 안된다, 소금은 더더욱 안된다, 설탕도 안된다,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생선이 먹고 싶다, 일본식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 우리는 조금도 선생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식사 후 선생은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워물었다. 세상에 맛있는 것이 담배 이상 뭐가 있겠느냐는 듯이 연기를 뿜어대는 그의 모습에서 생에 대한 애착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막 태어난 딸이 하나 있었다. 강보에 싸여 놀고 있는 딸아이 옆에서 마쓰자키 선생은 예사로 담배를 피웠다. 심지어는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불며 아이가 손까지 다 감싼 베넷 옷으로 얼굴을 비벼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선생님! 담배는 베란다! 아이에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 고함을 치면 선생은 알았다 알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문 채 베란다로 가는 척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피우던 담배를 다 피우곤 했다. 그런 선생이 내 집에서 먹고 자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한 달 정도를 머물렀다. “니가 만약에 니콘 살롱에서 초대전을 하던지 태양상을 받든지 하면 내가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 언젠가 와라지에서 선생과 술을 마시며 사진 일자리를 얻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선생의 답은 냉담했다. 니콘 살롱은 현역으로 현장에서 십 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전시를 할까 말까 한 곳이다. 학생의 신분으로는 어림 없는 곳이다. 태양상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실력을 키워라, 그러면 내가 적당한 시기에 너의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 는 따뜻한 한마디가 내게는 더 절실한 시기였다. 그의 사진 학교 1학년 겨울방학 동안 나는 동경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말 그대로 나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사진에만 몰두했다. 자면서도 꿈속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신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아침 니콘 살롱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모에 통과해 오는 5월, 신주쿠 니콘 살롱에 전시 일정을 잡아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바로 마쓰자키 선생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선생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저녁에 와라지에서 보자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와라지에서 만난 선생은 축하한다는 한 마디 외에는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선생의 답을 기다리던 내가 용기를 내어 일자리 얘기를 하려 하자 마쓰자키 선생이 날 보며 하는말이 “소도 뒷걸음질하다 줄을 잡는 수가 있다. 니콘 살롱에서 전시 한번 하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니가 세 번 전시를 한다면 내가 두말하지 않고 일자릴 알아봐 주겠다.” 나는 들었던 술잔을 그 자리에 딱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라지를 나와버렸다. 아무리 선생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밤새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배신감이 들어 두 번 다시 선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 나를 불러내 술친구를 삼던 선생에게서도 일체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난 어느 날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사십사 분에 강담사 정문 앞에서 보자. 카메라를 들고 나와라.” 선생은 간단하게 자기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담사는 어디 있으며 카메라는 왜 챙기라고 하는지. 머릿속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직감했다. 일거리다. 놓칠 수 없는 기회. 마쓰자키 선생은 솜씨를 두 번 요구하지 않는다. 한 번으로 끝이다. 멋진 일자리를 얻느냐, 다시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느냐는 내일 하루에 달렸다. 솜씨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그날 빌려온 친구의 카메라를 밤을 설쳐가며 손에 익혔다. 당시 나는 니콘 FM2 라는 카메라 한 대와 35미리 렌즈 하나밖에 없었다. 강담사까지는 지도를 들고 전철을 확인해가며 벌써 한번 다녀왔다. 내일 아침에 시간에 맞춰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취재 현장에서 촬영을 하는 동안 마쓰자키 선생은 일체 말이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주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조했고,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내 카메라와 빌린 친구 카메라로 같은 장면을 중복해서 찍었다. 혹시 카메라가 고장이 날지 모른다는, 고장이 나더라도 어느 카메라건 한 쪽에는 꼭 사진이 찍혀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한치의 긴장도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취재가 끝난 저녁, 파김치가 되어 암실에서 프린트를 해 가지고 나왔다. 마쓰자키 선생은 사진은 보지도 않고 위층의 편집실로 가지고 갔다. 얼마 후 돌아온 선생은 와라지로 가자고 했다. 가는 동안 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바늘방석이었다.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매 맞는 아이보다 매를 기다리는 아이가 더 공포에 떤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게다. 와라지에서 몇 잔 술을 연거푸 드신 선생은 초조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데스크에게 다음 일을 너에게 맡겼다.” 선생의 입가에 아주 짧게 웃음이 번지는 듯했다. 반년 이상을 선생과 술을 마셨지만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잘해봐라.” 선생은 자신의 술잔으로 내 술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쓰자키 선생은 포토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는 자유기고가로서 초일류의 카메라맨을 마음대로 선별해서 쓸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마쓰자키 선생이 인정했다. 너무도 기쁜 일이었지만 나도 어느새 마쓰자키 선생처럼 냉정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내 집에서 한 달을 머문 마쓰자키 선생은 어느 날 아침 이혼한 아내가 있는 뉴욕으로 가겠다며 갑자기 짐을 챙겼다. 짐이라 해야 수건 몇 벌과 대학노트 몇 권이었다. 그리고는 바래다 드리겠다는 우리를 뿌리치고 혼자 택시를 타고 휑하니 가버렸다. 본래 그런 선생이다. 당황해 하는 아내에게 나는 이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선생은 어제 저녁 나를 앉혀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알다시피 니가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하지만, 너만큼 찍는 카메라맨은 세상 어디를 가나 수두룩하다. 기획이 구십, 사진은 열이다. 냉정하게 세상을 보고 깊은 철학의 잣대를 가지고 우선 생각을 해라. 사진을 찍기 전에 찍는 너와 찍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파악해라. 충분히 그러고 난 뒤 확신이 서면 그때 그것을 인화지에 옮겨라. 그게 사진가다. 사진가란 사상가다. 카메라란 니 사상을 옮기는 연필 같은 도구다. 철학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저 찍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국 남에게 휘둘린다. 내가 너에게 일본어로 기사를 쓰게 한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너는 이제부터 혼자 살아야 한다. 나를 무참히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또 누군가에게 기댈지 모른다. 이전에 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런 날이 가깝게 온 것 같다.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천상천하에 혼자 설 기회를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라.”

그런 날이 닷새가 지난 새벽에 왔다. 내 집에서 가까운 특급호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마쓰자키라는 일본 사람이 체크아웃을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전화를 하면 해결해줄 것이니 전화를 하라고 해서 이렇게 새벽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모진 것이 정인데 마쓰자키 선생의 가르침은 너무도 혹독했다. 선생은 왜 나와의 인간관계까지 시험대에 올리면서 홀로서기를 가르치고자 했을까. 나는 호텔 측에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혹시 정말로 돈이 없어서 그런것은 아닌가. 뉴욕에 간다는 선생이 호텔에서 닷새 동안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견딜수가 없었다. 바쁘게 차를 몰아 그 호텔 프론트로 갔지만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마쓰자키 씨는 현금으로 다 계산하고 약 30분 전에 체크아웃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쓰자키 선생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동경과 뉴욕에 전화를 해도, 전화번호도 다 바뀌어버렸다. 죽음을 앞둔 선생이 내 집에 왔었다. 제자에게 이토록 뼈아픈 고백을 하게 해놓고, 그리고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음악)

네 잘 들으셨습니까. 이 마쓰자키 선생이라는 분 대단하죠. 네, 옛날에 일본에서 가르쳤던 제자의 한국 집에 와서 네 그 아파트에서, 갓난애기한테 담배 연기를 뿜어대면서 한 달이나 버티면서, 이거 먹고 싶다 저거는 싫다 그러면서 네, 괴롭히고, 또 뉴욕에 간다더니 웬 특급호텔에 가가지고 오일 동안이나 지내고 프론트에게 시켜 가지고 호텔비 내라 그러구요. 네, 네 어떤 이 지독함이 있습니다. 네 일본이 참 좋은 사진가를 참 많이 배출했는데요. 네 이 마쓰자키 선생, 같은 분 이런 장인들, 네 어떻게 사진을 배웠는지,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지 좀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요? 네… 이 신주쿠에 있는 니콘 살롱은 저도 가본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이 카메라 회사들은 니콘 살롱, 뭐 펜탁스 뭐, 갤러리 인가요? 뭐… 하여튼 이런 펜탁스, 니콘, 하여튼 후지, 이런 카메라 또는 필름 브랜드들은 일종의 그 쇼룸으로써, 일본의 회사들은 쇼룸의 전통을 강하게 갖고 있죠? 이.. 그 좋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갤러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네, 이제 학교 갓 들어온 학생보고 일자리 좀 달라고 했더니 니콘 살롱에서 전시를 하면 일자리를 주겠다는 둥 뭐 이러면서 네… 그 절대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몰아가는 이 마쓰자키 선생, 그러나 그 죽음의 순간에 이 서울에 있는 이 김홍희 씨를 찾아오고 네 여기서 생전에 알던 사람들 그것도 제자를 또 어디론가 찾아갔겠죠.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 네 이런 것도 마치 일본 소설가의 어떤 작품을 보는듯한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일본적인 허무, 니힐, 이런 것들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글이었습니다.

이 방랑, 이 산문집 보시면요. 앞부분에 이 김홍희 씨가 일본 가서 막 고생한 얘기 나오거든요? 네 그런 사전의 맥락을 알고 계시면 이분이 그 마쓰자키 선생한테 네 얼마나 절박하게 일자리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좀 더 절절하게 느끼실 수 있을텐데요. 어쨌든 오늘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사진가의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네 오늘 팟캐스트 시작하면서 어 여행 얘기로 운을 뗐는데요. 이런 김홍인 씨의 산문집 방랑은 딱히 읽고 나면 여행을 떠나고 싶기 보다는요, 뭔가 쎈 것과 부딛히고 싶다, 이런 열망을 이렇게 좀 불러일으키는 책입니다. 뭔가 고생도 진하게 하고 싶고, 그리고 어딘가에 가서, 정말 지독한 사람, 쎈 사람과 이렇게, 맞부딪히면서 어… 정말 인생 그 자체를 겪고 싶다. 네,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자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