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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36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 Part 2

Episode 36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 Part 2

왜 고전을 읽는가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정의로 시작해 보자.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러한 정의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이제 막 세계를 접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의 일부라 할 고전 작품을 처음 대하는 시기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와 고전을 처음 마주한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나타낸다.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저작을 모두 읽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 생시몽은? 레츠 추기경의 회고록은? 위대한 소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9세기의 작품들조차 사실은 언급되는 것만큼 많이 읽히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학교에서부터 발자크를 읽기 시작하는데, 발자크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쇄를 거듭해 출간되는 걸 보면, 프랑스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발자크에 대한 선호도를 공식적으로 조사해 본다면, 아마도 순위에서 한참 뒤에 밀려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디킨스 애독자들은 소수의 엘리트로 서로 만나기만 하면 디킨스 소설 등장인물들을 진짜로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언급하고, 작품 속 에피소드들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미셸 뷔토르는 미국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수년 동안,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에밀 졸라에 대해 질문해 오는 통에 지쳐 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뷔토르는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독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책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신화적인 인간의 계보학과 우주기원론을 다룬 너무나 멋진 책이었던 것이다. 뷔토르는 자신의 이러한 발견을 이 작품을 주제로 한 훌륭한 논문으로 남겼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즐거움에는 어린 시절 읽을 때 느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쁨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든 경험이 그러하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읽는 책 모두에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반면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 또 그 의미를 감상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정의를 내려 볼 수 있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만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인내심도 부족하고 집중력도 약한 데다, 읽는 기술도 서툴며, 인생 경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독서를 통해서는 그다지 큰 가치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독서가 실제로 삶에 근본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그러한 독서가 앞으로 하게 될 경험을 미리 보여 줄 때, 혹은 세상을 경험하는 데 일종의 모델이 되어 줄 때다. 말하자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실제 경험을 책에서 읽은 것과 비교하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할 때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는 모든 것들을 이끌어 줄 때를 말한다. 설령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떠올릴 수 없다 해도 그렇다.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변치 않는 핵심들을 재발견하게 된다.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러한 내면의 핵심들은 이제 우리의 내적 메커니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몰라도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은 특별한 잠재력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씨앗을 남겨 둔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을 재발견하는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된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우리 자신이 작품 자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또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읽는다'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 혹는 여러 다른 문화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이러한 정의는 고대와 현대의 고전 모두에 해당된다.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는다면, 나는 분명 호메로스의 글을 읽는 것이겠지만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에게 의미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원전이 그러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거기에 덧붙여지거나 변형되거나 확대된 것은 없는지 찾아보게 될 것이다. 카프카를 다시 읽는다면 나는 사람들이 아무데나 끌어다 쓰는 ‘카프카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것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이유를 작품 속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는다면 나는 책 속의 인물들이 우리 시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등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는 다른 책을 해설하는 어떠한 책도 해당 원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학교는 실제로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반대로 기억하게 만든다. 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즉 원전의 의미를 원전 자체보다 더 풍부하게 말해 준다고 떠벌리는 매개물들이 없을 때만 읽어 낼 수 있는 것들을, 수많은 서문, 비평문, 참고 서적 들이 연막처럼 차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고전에서 잘 아는 어떤 것을 혹은 우리가 잘 안다고 믿는 사실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고전 작품이 그것들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는 사실을 혹은 그것들이 작품과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다. 잘 아는 사실을 고전 작품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놀라워하면서도 큰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들의 원천을 발견할 때나 작품과 맺는 관계를 알게 될 때, 어떤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처음 했는지를 알게 될 때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고전 작품이 고전으로 ‘기능'할 때 다시 말해 그 작품이 독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다. 작품을 대할 때 아무런 불꽃도 일지 않는다면, 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그 작품이 좋아서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읽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일정한 양의 고전을 습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학교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는 나중에 ‘나만의' 고전이 될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학교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방법 틀을 가르쳐 줄 뿐 정작 자신만의 고전을 진정으로 선택하는 일은 학교를 졸업한 후나, 학교 바깥에서 일어난다.

자유롭게 읽는 그때에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Episode 36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 Part 2

왜 고전을 읽는가 Why read classics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정의로 시작해 보자. Let's start the story of the classic with the following definition.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A classic is a book where people usually say, "I'm reading .... again," and never say, "I'm reading .... now."

이러한 정의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This definition applies to people who have read some books, rather than young people. 이제 막 세계를 접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의 일부라 할 고전 작품을 처음 대하는 시기에 있기 때문이다. This is because young people who are just getting in touch with the world are at the time of first encountering classic works that will be part of the world. 세계와 고전을 처음 마주한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It can be said that young people are in a very important period in that they first encounter the world and the classics.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나타낸다. The word'again' in front of the verb'read' indicates the hard hypocrisy of those who are ashamed that they haven't read a famous work yet. 그들이 안심하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리 청소년기부터 폭넓게 책을 읽어 왔다 해도, 항상 읽지 못한 중요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What they can do to reassure them is to point out that no matter how widely they have read books since adolescence, there are countless important works that they have not always read.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저작을 모두 읽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 If you have read all of Herodotus and Thucydides, raise your hand. 생시몽은? 레츠 추기경의 회고록은? Cardinal Lets' memoirs? 위대한 소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9세기의 작품들조차 사실은 언급되는 것만큼 많이 읽히지 않는다. Even the works of the 19th century, which can be called the era of great novels, are not actually read as much as they are mentioned. 프랑스인들은 학교에서부터 발자크를 읽기 시작하는데, 발자크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쇄를 거듭해 출간되는 걸 보면, 프랑스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는 모양이다. French people start reading Balzac from school, and seeing that Balzac's works are published one after another, it seems that French people continue to read his work after graduating from school.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발자크에 대한 선호도를 공식적으로 조사해 본다면, 아마도 순위에서 한참 뒤에 밀려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But if you look into Italy's preferences for Balzac officially, you'll probably see that it's far behind the list. 이탈리아에서 디킨스 애독자들은 소수의 엘리트로 서로 만나기만 하면 디킨스 소설 등장인물들을 진짜로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언급하고, 작품 속 에피소드들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In Italy, Dickens enthusiasts are a small number of elites who mention the characters of Dickens' novels as if they really know the characters, and tell the story by pulling out the episodes in the work. 미셸 뷔토르는 미국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수년 동안,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에밀 졸라에 대해 질문해 오는 통에 지쳐 버렸다고 한다. During her years of teaching literature in the United States, Michelle Bitter said she was tired of being repeatedly asked questions about Emil Zola, whom she had never read. 이 때문에 뷔토르는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독하기로 결심했다. Because of this, Vitor decided to read [Lugong Makar Series]. 그리고 그 책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신화적인 인간의 계보학과 우주기원론을 다룬 너무나 멋진 책이었던 것이다. 뷔토르는 자신의 이러한 발견을 이 작품을 주제로 한 훌륭한 논문으로 남겼다. Vitor left these discoveries of his own as an excellent treatise on the subject of this work.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즐거움에는 어린 시절 읽을 때 느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쁨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든 경험이 그러하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읽는 책 모두에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All experiences will be the same, but childhood brings a unique interest and importance to every book you read. 반면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 또 그 의미를 감상하게 된다. On the other hand, when you read as an adult, you appreciate more details, various aspects, and their meaning.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정의를 내려 볼 수 있다. Therefore, another definition can be made as follows.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A classic is a book that offers valuable experiences to readers who have come to like and read it.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만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인내심도 부족하고 집중력도 약한 데다, 읽는 기술도 서툴며, 인생 경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독서를 통해서는 그다지 큰 가치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독서가 실제로 삶에 근본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그러한 독서가 앞으로 하게 될 경험을 미리 보여 줄 때, 혹은 세상을 경험하는 데 일종의 모델이 되어 줄 때다. 말하자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실제 경험을 책에서 읽은 것과 비교하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할 때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는 모든 것들을 이끌어 줄 때를 말한다. In other words, when reading from childhood leads to everything that works within us. 설령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떠올릴 수 없다 해도 그렇다.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변치 않는 핵심들을 재발견하게 된다.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러한 내면의 핵심들은 이제 우리의 내적 메커니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몰라도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은 특별한 잠재력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씨앗을 남겨 둔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Classics are books with a special influence.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을 재발견하는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된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우리 자신이 작품 자체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또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Also, whenever I read the work again, I take it as a whole new thing. 따라서 ‘읽는다'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Therefore, it is not that important whether you say'read' or'read again'. 우리는 사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 We should actually say: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A classic is a book that makes you feel like you're reading it for the first time every time you read it again.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Classics are books that give us the feeling of'rereading' even when we first read it, as if we had read it before. 6\\\\. 고전이란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A classic is a book with endless things to tell its readers.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 혹는 여러 다른 문화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Classics are books that come back together with the shadows of interpretations that have been done before, and they bring back the traces of the past left by one culture, different cultures, or different cultures.

이러한 정의는 고대와 현대의 고전 모두에 해당된다. This definition applies to both ancient and modern classics.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는다면, 나는 분명 호메로스의 글을 읽는 것이겠지만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에게 의미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If I read [Odysshea] again, I would certainly be reading Homer's, but it reminds me of everything that Odysseus' adventures have meant to people over the centuries. 또한 원전이 그러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거기에 덧붙여지거나 변형되거나 확대된 것은 없는지 찾아보게 될 것이다. You will also look to see if the original text contains those meanings, and if there is anything added to it, altered or enlarged. 카프카를 다시 읽는다면 나는 사람들이 아무데나 끌어다 쓰는 ‘카프카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것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이유를 작품 속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If I read Kafka again, I would try to find in the work why people would agree or reject what the'Kafka-like' adjective that people use everywhere.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는다면 나는 책 속의 인물들이 우리 시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If you read Turgenev's [Father and Son] or Dostoevsky's [Evil Spirit], I will consider how the characters in the book are constantly reviving in our time.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그 책에 대해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Every time we read a classic, we are amazed by comparing it to the images we had previously thought about the book. 이것이 바로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등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This is why secondary books, commentaries, and explanatory books about the work must be avoided and advised to read the original text.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는 다른 책을 해설하는 어떠한 책도 해당 원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It must be emphasized that in middle and high schools or universities, no book that explains other books tells more stories than the original. 그러나 학교는 실제로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반대로 기억하게 만든다. But schools actually make students remember this fact in reverse. 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Contrary to this story is widespread. 즉 원전의 의미를 원전 자체보다 더 풍부하게 말해 준다고 떠벌리는 매개물들이 없을 때만 읽어 낼 수 있는 것들을, 수많은 서문, 비평문, 참고 서적 들이 연막처럼 차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A classic is a work that constantly creates a cloud of critical discourse surrounding it.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And those clouds of criticism always extinguish themselves.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Classics don't necessarily teach us things we don't know. 우리는 고전에서 잘 아는 어떤 것을 혹은 우리가 잘 안다고 믿는 사실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고전 작품이 그것들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는 사실을 혹은 그것들이 작품과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다. 잘 아는 사실을 고전 작품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놀라워하면서도 큰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들의 원천을 발견할 때나 작품과 맺는 관계를 알게 될 때, 어떤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처음 했는지를 알게 될 때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고전 작품이 고전으로 ‘기능'할 때 다시 말해 그 작품이 독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다. Of course, these things happen when a classic work'functions' as a classic, that is, when it enters into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reader. 작품을 대할 때 아무런 불꽃도 일지 않는다면, 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Reading is meaningless if there is no spark when dealing with the work. 오직 그 작품이 좋아서 읽어야 한다. I only have to read it because I like it. 학교에서 읽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일정한 양의 고전을 습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학교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는 나중에 ‘나만의' 고전이 될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학교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방법 틀을 가르쳐 줄 뿐 정작 자신만의 고전을 진정으로 선택하는 일은 학교를 졸업한 후나, 학교 바깥에서 일어난다.

자유롭게 읽는 그때에야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