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받은 피 (나가노, 1978년 8월)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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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저주받은 피. 나가노, 1978년 8월.
한수의 운전사는 요코하마 역 북쪽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자를 발견하고는
지시받은 대로 검정색 세단으로 안내했다.
뒷좌석에는 한수가 앉아 있었다.
선자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아줌마 특유의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리려고 정장 재킷을 끌어내렸다.
지금 그녀는 모자수의 여자친구
에쓰코가 골라준 프랑스 디자이너의
드레스에 이탈리아제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예순두 살인 선자는 딱 그 나이의 여자처럼 보였다.
장성한 아들 둘의 어머니이고 할머니인 여자.
인생의 대부분을 바깥에서 일하며 보낸 여자답게,
도쿄의 부유한 부인처럼 차려입었지만
주름지고 얼룩덜룩한 피부와 짧은 흰머리 때문에 쭈글쭈글한 보통 여자처럼 보였다.
"어디 가는 깁니꺼?"
"나가노." 한수가 대답했다.
"노아가 거기 있어예?"
"그래. 반 노부오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16년째 그곳에서 살고 있더군.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서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됐어."
"그러면 솔로몬한테 사촌이 넷이나 생기는 거네예!
와 우리한테 말을 안 했을까예?"
"노아는 지금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어.
나가노 사람들은 노아가 조선인이라는 걸 몰라.
노아의 아내와 아이들도 모르고 있고.
노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노아가 순수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해."
"와예?"
"노아가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러기가 쉽습니꺼?"
"쉽다면 쉽지. 노아가 일하는 세계에서는 남의 사생활을 캐는 데 관심 갖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라예?"
"노아는 파친코를 운영하고 있어."
"모자수처럼 말입니꺼?"
파친코 사업장에서는 경품 관리는 물론 기계 제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조선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자는 노아가 모자수와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모자수는 어때?"
"잘 지냈니더." 선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사업은 잘 되고?"
"요코하마에서 또 가게를 샀어예."
"솔로몬은? 이제 많이 컸겠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잘합니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예.
노아에 관해서 더 마이 알려주이소
"잘 지내고 있어."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가는 걸 알고 있습니꺼?" // "아니." // "그러면 . . ."
"노아는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뭐, 날 만나기 싫은 거겠지.
너는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몰라. 하지만 널 만나고 싶었다면 더 빨리 연락을 했겠지."
"그라모 . . ."
"오늘은 노아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게 좋아.
하지만 네가 노아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데려가는 거야.
멀리서 볼 수는 있거든. 노아는 본사에 있을 거야."
"그걸 우찌 압니꺼?" // "그냥 알아."
한수는 두 눈을 감고 하얀 레이스로 감싸인 머리 받침대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한수는 노아가 평상시처럼 거리 맞은편에 있는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계획이었다.
노아는 항상 주중에 매번 다른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했는데
수요일에는 국수집에서 식사를 했다.
한수의 사설탐정들이 나가노에 사는 노아의 생활을 세세하게 조사해서
26쪽의 보고서로 작성해 올렸다.
그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노아가 한결같은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노아는 술을 마시지도, 도박을 하지도 않았다.
또한 여자들과 노닥거리지도 않았고 뚜렷한 종교도 가지지 않았다.
노아의 아내와 네 아이들은 평범한 가정의 중산층 일본인처럼 생활했다.
"노아가 혼자 점심을 먹을까예?"
"노아는 항상 혼자서 점심을 먹어.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15분 내에 국수를 먹고 나서
영어 소설책을 잠깐 읽은 다음에 사무실로 돌아갈 거야.
그래서 노아가 그렇게 성공한 것 같아. 실수를 하지 않지. 노아에게는 계획이 있어."
한수의 목소리에는 자기 아들답게 행동하는 노아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노아가 저를 만나줄까예?"
"그건 잘 모르겠어.
이번에는 차에서 기다렸다가 노아를 힐끗 보기만 해.
그 후에 운전사가 우리를 요코하마로 데려다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다음 주에 다시 올 수 있어. 먼저 노아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고."
"오늘 만나는 거랑 다음 주에 만나는 거랑 다를 게 뭐 있다고 그라예?"
"노아가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면
굳이 노아를 만나지 않아도 될지 모르잖아.
선자야, 노아는 이런 삶을 선택했어.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몰라."
"노아는 제 아들입니더."
"내 아들이기도 해."
"노아와 모자수는 제 인생의 전부라예."
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자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런 감정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저는 제 자식들을 위해서 살았심더."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교회에서 목사는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지나치게 보살핀다고 말하며, 가족을 숭배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목사는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가족은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엄마가 되자
선자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노아도 아이 아버지가 되었으니,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저기 봐. 노아가 나오고 있어." 한수가 말했다.
아들의 얼굴은 조금밖에 변하지 않았다.
관자놀이를 따라 희끗 해진 회색 머리카락에 선자는 깜짝 놀랐지만,
노아는 마흔다섯 살이었고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었다.
노아는 이삭의 쓰던 것과 비슷한 둥근 금테 안경을 썼고,
호리호리한 몸에 수수한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얼굴은 한수와 판박이였다.
선자가 자동차 문을 열고 나갔다.
"노아야 !" 선자가 소리치며 노아에게 달려갔다.
노아가 돌아서서 열 발자국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노아가 웅얼거렸다.
노아가 선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을 만졌다.
노아는 이삭의 장례식 이후로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엄마는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아는 우는 엄마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엄마를 만나자 안도감이 들어서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제 사무실로 들어가요.
어떻게 여기 왔어요?" 노아가 말했다.
선자는 숨이 차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고한수가 델다주었데이. 그 사람이 널 찾아내서 델다줬다 아이가.
내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하니까. 그 사람은 지금 차에 있데이."
"그렇군요. 음, 그 사람은 그냥 차에서 기다리게 두세요."
노아가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인사를 했고,
선자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노아는 선자에게 사무실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 문을 닫았다.
"좋아 보여요. 엄마." 노아가 말했다.
"니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데이.
노아야, 니 걱정을 무지 많이 했다."
선자는 노아의 상처받은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래도 니가 편지를 써줘서 참말로 기뻤데이. 니가 보낸준 돈은 다 모아뒀다.
내한테 돈을 보내다니 참말로 고마웠데이."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고 고한수가 그러대."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아들 하나에 딸이 셋이에요. 아주 착한 아이들이에요.
아들만 빼고 다들 공부를 잘해요. 아들은 훌륭한 야구 선수죠.
아내가 아들을 제일 사랑해요.
그 애는 외모나 행동이 모두 모자수를 닮았어요."
"모자수도 니를 만나고 싶어 할 기다.
우리를 보러 언제 올 수 있노?"
"모르겠어요. 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만큼 시간이 지났으면 충분하지 않나?
오래 세월이 흘렀데이.
노아야, 제발 엄마를 용서하거레이. 제발 부탁한다.
엄마가 고한수를 만났을 때는 어렸다 아이가.
고한수가 결혼한 사람인지도 몰랐데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첩이 되지 않겠다고 캤다.
그때 니 아버지가 나랑 결혼해서 너한테 제대로 된 이름을 줄 수 있었고,
난 평생 동안 느그 아버지 백이삭에게 충실했데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느그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 사람에게 충실 . . . "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제 생부는 고한수죠.
그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 노아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 . . "
"전 이 더러운 업계에서 일하는 조선인이에요.
제 피 속에 흐르는 야쿠자 기질이 절 지배하는 것 같아요.
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어요. "
노아가 소리내어 웃었다. "저주받은 피죠."
"하지만 니는 야쿠자가 아이다." 선자가 반박했다.
"안 그렇나?
모자수도 파친코에서 일하지만 아주 정직하데이.
항상 좋은 사장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나쁜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지 궁리하고 . . . "
노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전 정직하지만 이 업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 아주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노아는 뭔가 신 것을 먹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착한 아이데이, 노아야. 난 니가 . . . "
선자는 이렇게 말하다가 노아를 아이라고 부른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말은 니가 훌륭한 사업가라는 기다. 정직하고. "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노아가 오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엄마는 지친 노인처럼 보였다.
"차 좀 드릴까요?" 노아가 물었다.
지난 세월 동안 노아는 엄마나 동생이 사무실이 아니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엄마가 이곳 사무실로 찾아온 덕분에 일이 한층 더 쉬워졌다.
다음에는 고한수가 내 사무실로 찾아올까?
고한수가 자신을 찾아내는 데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뭘 좀 먹고 싶으세요? 뭐 주문해서 . . . "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그라."
노아가 웃었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전 이제 아이가 아니에요."
니는 니를 낳은 걸 후회하지 않는데이
니는 내 보물이다 아이가 난 떠나지 않을 . . . "
"제가 조선인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요. 단 한 명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기다.
니 마음 안데이. 뭔 일이든 . . . "
"아내도 몰라요.
아내의 엄마가 그 사실을 알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제 아이들도 모르고요. 그 아이들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실이 밝혀지면 전 해고돼요.
여기서는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거든요.
엄마, 아무도 . . . "
"니가 조선인이라는 게 그리 끔찍하나?"
"제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져요."
선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갠 양손을 바라봤다.
"노아야, 나는 니를 위해 기도했데이, 하나님께서 널 보호해주시길 기도했다.
그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니가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참말로 기쁘데이."
매일 아침, 선자는 새벽 예배에 나가서 아이들과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이 순간이 오기를 기도했다.
"아들 이름은 뭐꼬?" // "그게 중요해요?"
"노아야, 미안하데이, 정말 미안하데이.
니 아버지가 우리를 일본으로 데리고 왔고, 너도 알겠지만
온데서 전쟁이 터져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아이가.
고국에 돌아가도 삶이라는 게 없어데이. 지금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어. 나한테도 말이다."
"전 가봤어요." 노아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고?"
"전 이제 일본 국민이라서 여행을 갈 수 있어요. 남한에 가봤어요. 제 조국이라는 곳을 보러요."
"니가 일본 국민이라꼬? 우째 그럴 수 있노? 진짜가?"
"네, 가능해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죠."
"부산에 가봤나?"
"네 영도에도 갔어요.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선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전 지금 회의가 있어요.
죄송하지만 다음 주에 만나는 게 어때요? 제가 찾아갈게요.
모자수도 만나고 싶고요. 지금은 몇 가지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해요."
"정말이가? 집으로 올 기가?" 선자가 미소를 지었다.
"고맙데이. 노아야, 참말로 기쁘데이. 넌 정말 착한 . . . "
"지금은 그만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집에 돌아가시면 저녁에 전화할게요."
선자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고,
노아는 엄마를 방금 전에 만났던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노아는 한수의 차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 해요."
노아가 이렇게 말하고는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선자는 아들이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한수 자동차를 두드렸다.
운전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미소를 지었다.
한수는 선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노아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잘 됐심더. 노아가 다음 주에 요코하마로 오겠다 했어예.
모자수가 아주 기뻐할 거라예."
한수는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노아를 만났던 선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노아가 전화를 하지 않았을 때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의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선자는 한수의 전화를 받았다.
한수는 선자가 노아의 사무실을 떠난 직후에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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