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다섯 번째-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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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다섯 번째
강해룡 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은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며 몇 가지 당부를 했다.
“당에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선발해 온 동무들이니까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하리라고 믿소. 당 중앙에서도 동무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소.”
그는 숙희와 나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며칠 후에는 훌륭한 공작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가서 학습과 훈련을 잘 받기 바라오.”
강해룡 부부장은 우리를 이렇게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큰 소리로 답변하였다.
“앞으로 열심히 학습하여 당 중앙에서 거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애썼다. 강해룡 부부장은 함께 밥을 먹는 도중에, “여기 온 느낌이 어떤가?”하고 물으며 나이 어린 처녀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직접 확인해 보려 하였다.
사실 그때 숙희와 나는,
‘사회에서 듣던 대로 공작원은 적후에 뛰여 들어 별의별 활동을 다 해야 할 텐데 과연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공포심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강 부부장에게 우리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는 많은 경험으로 이미 우리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음 날은 정 지도원의 안내로 숙희와 같이 ‘금수산 양복점'에 가서 치마와 블라우스를 맞추고 돌아왔다. 금수산 양복점은 개선문과 북새거리 중간 지점에 있는 양복점으로 공작원의 옷을 전문적으로 맞춘다 했다.
숙희와 나는 공작원 양성소인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입교하기 전까지 김일성에 관한 문헌을 뒤져 보거나 하루에 한 번 정도 그 부근에 있는 공작원 전문 영화관에 가서 김일성의 외국방문, 외국원수 접견, 각종 행사, 현지 지도 등을 소재로 한 기록영화를 관람했다. 또 며칠 동안 초대소 생활을 하다나니 그 주변 지리를 알게 되여 부근 산으로 산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회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초대소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가진 이 한가한 시간들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시간이였다.
동북리 일대에는 농저저수지를 중심으로 많은 초대소가 산재되여 있었다. 내가 처음 들어간 초대소는 동북리 10호 초대소 였으며 그 후 2호, 3호, 9호 초대소로 옮겨다니며 수용되였는데 1호부터 4호까지는 단층 초대소였다. 이렇게 초대소를 자주 옮기는 리유는 공작원의 지루함도 덜어주고 비밀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듣자니 아무개 선생은 초대소 생활만 10년, 20년 하면서도 특별한 임무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초대소 생활을 오래 하다나면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사회에 나가서도 불행해지는 일도 있다. 제발 임무를 받아 초대소 생활을 끝냈으면 하는 공작원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 공작원과 맞는 임무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 사람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초대소는 공작원들의 격리 수용소나 다름없는데 동북리 일대는 요소 요소에 초소를 만들어 놓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공작원들의 자유주의를 감시하기도 한다.
나는 초대소 생활 동안 숙희와 초대소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더 힘들고 외롭게 지냈을 것이다.
그 후 동북리 10호 초대소에서 일 주일간 휴식한 뒤 1980년 4월 7일 숙희와 나는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옮겨졌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