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번째-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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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번째
금성정치군사대학 교육이 끝나기 3일 전에 그동안 배운 전 과목에 대한 종합평가를 받았는데 모두 높은 성적으로 평가가 내려졌다. 졸업을 앞두고 그간의 생활에 대한 총화를 적어낼 때 나는 많은 느낌을 가지고 써내려갔다.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신임과 배려 속에서 1년간의 학습과 훈련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성과가 많았다. 우선 나 자신이 당의 유일사상체제를 철저히 확립하여 남조선 혁명의 길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싸워갈 결심을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또한 조직생활에서도 비록 그 누구의 통제가 없었지만 주간 생활총화를 어김없이 하고 조직에서 맡겨 준 과제를 철저히 수행하며 항상 조직에 의거해서 생활하여 나 자신의 조직성을 단련하였다. 학습과 훈련도 시간을 아껴가며 열심히 하여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가 있는 반면에 그 기간 중 고쳐야 할 결함들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정치학습을 시간이 바쁘다고 형식주의적으로 한 번 읽고 지나쳐 정치학습에 대한 관점이 바로 서 있지 못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충성심이 부족하고 정치학습을 소홀히 여기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학습과 훈련을 하는 데서도 바쁘다는 구실로 형식적으로 한 결함도 있었다. 복습과 예습은 따로 하지 않았고 강의에 참가하여 조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정상적인 학습을 하지 못했다.
특히 행군을 일관화하지 못하고 비가 오면 비를 빙자하고 몸이 고단하면 병을 빙자하여 행군을 안 하려고 요행수를 바라기도 했었다. 결함원인은 혁명가로 준비하겠다는 높은 각오가 없어 안일 해이하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신을 더욱 수양, 단련하여 훌륭한 혁명가가 되어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신임과 배려에 보답하겠다.> 마지막을 청산하는 총화를 쓰다나니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후회감도 없지 않았다.
훈련 1년 만에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식은 입학식을 했던 강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입학식과는 달리 학장, 부학장, 지구장, 교양 지도원뿐 아니라 혁명력사, 노작, 사상, 철학, 정치경제학, 정보학 지도원이 참석해 우리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식순에 따라 교양 지도원이 대독한 졸업 선서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방송에 이어 학장의 축사가 있었다. 1년간의 학습과 훈련 전체를 총화한 뒤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된 것을 치하하고 졸업 후에도 일 잘 한다는 소식을 기대한다는 격려로서 축사를 끝맺었다. 그리고 ‘어버이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라는 노래를 틀어 식을 끝마쳤다. 1년간 고되게 훈련받던 기억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또 얼마나 대견해 하셨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년 동안 소식을 전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지냈으니 어머니의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하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졸업식을 마치고 초대소로 돌아오니 정 지도원이 우리를 데리고 가기 위해 벤즈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지금의 우리 가족은 저 사람이다' 하는 것이 실감되었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집으로 옮겨질 것이었다.
숙희와 나는 동북리 9호 초대소로 옮겨졌다. 우리는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2과 소속이었다. 동북리 9호 초대소 역시 동북리 10호 초대소와 건물 형태나 내부 구조가 거의 같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재학습을 받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