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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2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2

그래서 그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 뭘 읽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선택한 작가는 대표적으로 이 밀란 쿤데라 였고요, 또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작가는 90 년대 초반에 한국문학계의 그당시 글을 쓰거나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요 소설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이 소설은 사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80 년대의 유럽에서 생산, 아니 전세계에서 생산된 발표도니 소설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문제작입니다. 훌륭한 소설이고요, 그 이후에도 이것에 필적할만한 소설을 별로 쓰여지지 않았고 심지어 밀란 쿤데라 자신도 이 작품을 넘어서는 작품을 쓴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뒤에 [불멸]이라던가 [정체성], [느림] 이런 소설들을 밀란 툰데라는 꾸준히 썼습니다만, 소설은 점점 어떤 에세이화하면서요 이 소설이 갖고 있었던 아주 복합적인 매력과 어떤 긴장들을 더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 소설이 왜 이상한가? 네,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요. 일단은 보통 소설에서는 작가의 사변적인 생각을 소설 안에 넣어서 처리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라든가요. 예컨데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같은 걸 보면 뭐 그당시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주인공들이 뭐 몇 페이지 씩 이야기를 하죠. 그걸 에세이로 쓸수는 없고, 등장인물을 통해서 전달해야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건데, 그 추운 지리산에서 실제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죠. 남의 얘기 오래 듣기도 쉽지가 않고요. 하지만 뭐 소설에서는 그렇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전통적인 소설에서 했던 방식인데, 밀란 쿤데라는 작가가 그대로 소설의 지면에 에세이를 쓰는 것 처럼 표현합니다. 즉 등장인물의 입을 빌리지 않고요 그냥 씁니다. 그냥 쓰고요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상한 점 또 하나는 등장인물 조차도 마치 살아있는 인물처럼 묘사하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작가들을 등장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노력을 하죠. 즉,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우리 옆동네에 살고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그려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반해서, 이 밀란 쿤데라는 그런 어떤 사실주의적인 전통이랄까요, 이런 것을 부정하면서 등장인물을 작가가 지금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즉,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장면이 포착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마치 요새 건물들 보면 덕트나 뭐 환풍장치 이런것들을 그대로 노출시킨 건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 처럼 이건 결국 소설이야, 소설이잖아 라고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대담함이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일종의 연애소설로 읽히는 부분이 있고요, 또 정치적인 어떤 사회적인 여러가지 문제과 등장인물들이 긴장을 일으키면서 조마조마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구조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등장인물들이 육체를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움직이면서 독특한 어떤 소설적인 매력을 풍겨내는 것이죠. 이런 작업은 쉽지가 않죠. 네, 작가로서 볼때 이렇게 쓰지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여간 이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장면, 소설이 시작하자마자나오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인 에세이 부분이 일단 제시가 되고 바로 주인공을 작가가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이 영원에 못박힌 꼴이 된다. 너무나도 무서운 생각이다. 영원한 재귀의 세계에서는 모든 동작에 견디어낼 수 없는 무거운 책임의 짐이 지워져 있다. 이러난 근거에서 니체는 영원한 재귀의 생각을 ‘가장 무거운 무게'라 일컬었다. 만약 영원한 재귀가 가장 무거운 무게라면 우리들의 삶은 이 배경 앞에서 아주 가벼운 것으로 찬란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정말 무섭고, 가벼운 것은 찬란한가? 가장 무거운 무게는 우리를 짓눌러 우리를 압사케 한다. 우리를 땅바닥에 압착시킨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사랑의 서정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를 육중한 무게를 동경한다. 따라서 가장 무거운 무게는 동시에 가장 집약적인 삶의 충족 이미지다.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땅에 가깝다. 그것은 더욱더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된다. 이와 반대로 무게가 전혀 없을 때 그것은 인간의 공기보다도 더 가볍게 되어 둥둥 떠올라 땅으로부터, 세속의 존재로부터 멀리 떠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절반만 실제적이고, 그의 동작은 자유롭고 동시에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자, 그러니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무거운 것을? 아니면 가벼운 것을?

기원 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온 세계가 여러가지 대립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빛-어둠, 섬세-난삽, 따뜻함-차가움, 존재-비존재 등. 그는 한쪽 극, 즉 빛, 섬세, 따뜻함, 존재를 양으로, 다른 극을 음으로 생각했다. 그와 같은 분할은 너무나 쉽게 보이지만 한 가지 어려움을 동반한다. 즉, 어떤 것이 양이냐 하는 것이다. 무거운 것이? 아니면 가벼운 것이?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나는 토마스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철학적 숙고의 조명 아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를 명백히 내 앞에 보게 되었다. 그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그는 약3주 전에 테레사를 보헤미안 지방의 시골도시에서 알게되었다. 그들은 겨우 한시간 동안 함께 보냈다. 그녀는 정거장까지 전성하여 그가 기차에 올라타기까지 기다렸다. 열흘 후 그녀는 프라하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 바로 그날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다.그날 밤 그녀는 몸에 열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독감으로 일주일 내내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2 Episode 27 - Milan Kundera "The Irresistible Lightness of Being" - Part 2 Episode 27 - ミラン・クンデラ「耐え難い存在の軽さ」 - Part 2

그래서 그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 뭘 읽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선택한 작가는 대표적으로 이 밀란 쿤데라 였고요, 또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작가는 90 년대 초반에 한국문학계의 그당시 글을 쓰거나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요 소설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이 소설은 사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80 년대의 유럽에서 생산, 아니 전세계에서 생산된 발표도니 소설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문제작입니다. 훌륭한 소설이고요, 그 이후에도 이것에 필적할만한 소설을 별로 쓰여지지 않았고 심지어 밀란 쿤데라 자신도 이 작품을 넘어서는 작품을 쓴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뒤에 [불멸]이라던가 [정체성], [느림] 이런 소설들을 밀란 툰데라는 꾸준히 썼습니다만, 소설은 점점 어떤 에세이화하면서요 이 소설이 갖고 있었던 아주 복합적인 매력과 어떤 긴장들을 더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 소설이 왜 이상한가? 네,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요. 일단은 보통 소설에서는 작가의 사변적인 생각을 소설 안에 넣어서 처리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라든가요. 예컨데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같은 걸 보면 뭐  그당시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주인공들이 뭐 몇 페이지 씩 이야기를 하죠. 그걸 에세이로 쓸수는 없고, 등장인물을 통해서 전달해야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건데, 그 추운 지리산에서 실제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죠. 남의 얘기 오래 듣기도 쉽지가 않고요. 하지만 뭐 소설에서는 그렇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전통적인 소설에서 했던 방식인데, 밀란 쿤데라는 작가가 그대로 소설의 지면에 에세이를 쓰는 것 처럼 표현합니다. 즉 등장인물의 입을 빌리지 않고요 그냥 씁니다. 그냥 쓰고요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상한 점 또 하나는 등장인물 조차도 마치 살아있는 인물처럼 묘사하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작가들을 등장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노력을 하죠. 즉,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우리 옆동네에 살고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그려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반해서, 이 밀란 쿤데라는 그런 어떤 사실주의적인 전통이랄까요, 이런 것을 부정하면서 등장인물을 작가가 지금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즉,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장면이 포착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마치 요새 건물들 보면 덕트나 뭐 환풍장치 이런것들을 그대로 노출시킨 건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 처럼 이건 결국 소설이야, 소설이잖아 라고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대담함이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일종의 연애소설로 읽히는 부분이 있고요, 또 정치적인 어떤 사회적인 여러가지 문제과 등장인물들이 긴장을 일으키면서 조마조마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구조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등장인물들이 육체를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움직이면서 독특한 어떤 소설적인 매력을 풍겨내는 것이죠. 이런 작업은 쉽지가 않죠. 네, 작가로서 볼때 이렇게 쓰지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여간 이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장면, 소설이 시작하자마자나오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인 에세이 부분이 일단 제시가 되고 바로 주인공을 작가가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이 영원에 못박힌 꼴이 된다. 너무나도 무서운 생각이다. 영원한 재귀의 세계에서는 모든 동작에 견디어낼 수 없는 무거운 책임의 짐이 지워져 있다. 이러난 근거에서 니체는 영원한 재귀의 생각을 ‘가장 무거운 무게’라 일컬었다. 만약 영원한 재귀가 가장 무거운 무게라면 우리들의 삶은 이 배경 앞에서 아주 가벼운 것으로 찬란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정말 무섭고, 가벼운 것은 찬란한가? 가장 무거운 무게는 우리를 짓눌러 우리를 압사케 한다. 우리를 땅바닥에 압착시킨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사랑의 서정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를 육중한 무게를 동경한다. 따라서 가장 무거운 무게는 동시에 가장 집약적인 삶의 충족 이미지다.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땅에 가깝다. 그것은 더욱더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된다. 이와 반대로 무게가 전혀 없을 때 그것은 인간의 공기보다도 더 가볍게 되어 둥둥 떠올라 땅으로부터, 세속의 존재로부터 멀리 떠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절반만 실제적이고, 그의 동작은 자유롭고 동시에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자, 그러니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무거운 것을? 아니면 가벼운 것을?

기원 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온 세계가 여러가지 대립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빛-어둠, 섬세-난삽, 따뜻함-차가움, 존재-비존재 등. 그는 한쪽 극, 즉 빛, 섬세, 따뜻함, 존재를 양으로, 다른 극을 음으로 생각했다. 그와 같은 분할은 너무나 쉽게 보이지만 한 가지 어려움을 동반한다. 즉, 어떤 것이 양이냐 하는 것이다. 무거운 것이? 아니면 가벼운 것이?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나는 토마스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철학적 숙고의 조명 아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를 명백히 내 앞에 보게 되었다. 그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그는 약3주 전에 테레사를 보헤미안 지방의 시골도시에서 알게되었다. 그들은 겨우 한시간 동안 함께 보냈다. 그녀는 정거장까지 전성하여 그가 기차에 올라타기까지 기다렸다. 열흘 후 그녀는 프라하에 있는 그를 찾아왔다. 바로 그날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다.그날 밤 그녀는 몸에 열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독감으로 일주일 내내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