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의 정조 박종화 2/2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소설오디오북ㅣ책 읽어주는 노벨라
뜻밖에 왕의 부름을 받았던 도미의 아내 아랑은
일단 거절하는 글월을 사자 편에 들려보냈지만
초조하고 불안해서 오히려 왕의 회답이 궁금했다
어찌 된 일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시 남편 도미가 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만일 죄를 지었다면 법소가 따로 있으니
법소에서 채근하고 다스릴 일이지
왕이 친히 부를 까닭도 없는 일이다
하고 생각해 봤다
남편이 하도 대궐 일을 잘하니까
그이에게 상을 내리고 나까지 대궐로 들어오라 한 것일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어떻든 조마조마 마음을 졸여 가며
어서어서 남편 도미가 돌아오기를
일각이 삼추처럼 고대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갈가마귀가 뒷산 밖에 어지럽게 날았다
귀는 울타리 밖으로만 쏠려진다
행여나 남편 도미가 돌아오는
씩씩하고 기운찬 발자취 소리가 들릴까 하고
가을 해가 서산에 넘기는 토끼 보다도 재빨랐다
그러나 아랑의 남편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은
하루보다도 길었다
땅거미가 완전히 동구를 어둡게 했다
그러나 남편 도미의 돌아오는 휘파람소리는
아직껏 들리지 않았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도미와 밥상을 대하고
재미있게 저녁을 먹을 때다
아랑은 배고픈 줄도 몰랐다
등잔을 꺼내 놓고 심지에 불을 다렸다
방이 환하게 불이 켜지니
벽에 비치는 아랑 제 그림자에
남편 도미가 왔나 하고 소스라쳐 놀래도 보았다
한 식경
두 식경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달도 없는 깊은 가을
짙은 밤 앙상한 나뭇가지에 울고 남은 싸늘한 바람이
가끔가끔 쏴 하고 문풍지를 울렸다
불똥을 튀기던 등잔엔 심지조차 타 들어가서
불빛까지 희미했다
아랑은 옥으로 만든 귀이개를 뽑아 심지를 돋우었다 잠깐 불빛은 밝았으나
초조한 마음속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내 아랑은 방문을 열고 뜰로 내려서서
삽짝문을 열고 여남은 걸음 떨어져 있는
이웃집 부전이를 찾았다
부전이는 지난해 남편을 잃은 홀어미다
아랑의 부르는 소리에 부전이는 창문을 열고
자던 눈을 쓱쓱 비비며 웬일이요 하고 물었다 좀 나와봐요
저기 도미가 여태 안 돌아왔어
쓸쓸해서 혼자 배길 수가 있어야지
나하고 둘이 있어줘요
응 부전이
웬일이래요 밤이 꽤 깊었는데 부전이는 한편 말하고 한편으론 부스럭거리며
치마를 두른 다음 문을 열고 아랑을 따라 섰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어둠 속에
하늘에는 별빛만이 총총했다
아랑과 부전이가 마악 아랑의 집 안에 들어앉았을 때다
동구 밖에 사람 소리가 두런두런하며
두서너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버적버적 들렸다
사람 소리가 나지
아랑은 부전의 얼굴을 쳐다본다
도미가 인제야 돌아오는 가봐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뜰 아래로 내려섰다
울타리 밖에는 횃불이 환하게 비치고
삽짝문이 스르르 열렸다
들어서는 사람은 도미가 아니요
금관에 홍포를 찬란히 입은 왕 개루였다
뒤에는 두어 사람의 시종이 따랐다
아랑은 가슴이 출렁 떨어지고
부전이는 영문을 몰랐다
횃불과 왕과 시종은 뜰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목수 도미의 집인가
시종 한 사람이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랑은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대답했다
도미의 아내 아랑이 누군가
저 입니다
아랑은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횃불이 더욱 가까이 비쳐졌다
불 아래 비치는 아랑의 고운 자태는
과연 월궁의 항아가 아니면
그림에 보는 관음 보살이었다
이윽이 아랑을 건너다보는 개루의 호화스러운 얼굴에는
소리 없는 만족의 미소가 물결쳐 흘렀다
올라가자 나는 이 나라의 왕 개루다
처음으로 개루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랑의 가슴은 더욱 떨렸다
그러나 왕을 인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랑은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태연히
참으로 태연히
공손하게 왕을 방 안으로 인도하고는
누추한 천민의 집에 옥가를 멈추시니 황감하옵니다
하고 문 밖에 고요히 서 있다
아랑아
개루는 자리에 앉아 홀린 듯 아랑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아랑을 부른다
아랑은 해사한 얼굴을 더욱이 단정히 가지고
허리를 굽혀 소리 없는 대답을 보낸다
아까 낮에 너를 불러도 오지 않기에
네 남편의 허락을 맡아 내가 온 길이다
너는 오늘 밤부터 내 후궁이 돼야 한다
내일 아침에 일찍이 대궐로 데려갈 것이고
아랑은 모든 일을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맑고 맑은 눈에는 광채가 반짝하고 빛났다
잠깐 동안 아랑은 새촘히 서 있다
싫으냐
싫으면 군사를 풀어서 잡아갈 것이고
네가 후궁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날이면
호강이야 말할 거 있느냐
백제 것이 모두 다 네 것이지
오뚝이 그림처럼 섰던 아랑은
깜짝하고 다시 눈동자를 굴리었다
치맛자락이 가늘게 움직였다
입에선 가벼운 한숨조차 나는 듯했다
정말이십니까
아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랑의 눈은 차마 개루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럼 내가 실없는 말을 할 리가 있느냐
아랑의 목소리를 듣자 개루의 입은 빙글빙글 벌려진다
시키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횃불을 끄고 시종을 물리쳐 주십시오
목욕을 하고 단장을 하겠습니다
횃불은 꺼지고 시종은 물러갔다 삽짝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한 시각 뒤
칠보 단장을한 아랑이
어서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개루가 앉은 방문 앞에서
등잔의 불을 꺼 주십시오
남편 있는 몸이라 부끄럽사옵니다
옥방울을 굴리는 듯한 아랑의 목소리가
닫혀진 방문 밖에 떨어졌다
개루는 미칠 듯이 좋았다
용포 자락으로 등잔 불을 후리쳐 껐다
이튿날 동이 환해서 흐벅진 졸음에서 눈을 떠 보니
자리 옆에 코를 골고 누운 것은
관음 보살 같은 아랑이 아니라
개기름이 얼굴에 지르르 흐르는 부전이었다
개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다
아랑을 찾으니 간 곳이 없다
건넛방은 덩그렇게 비었다
화가 불길같이 일어난 개루는
모든것이 목수 도미란 놈이 있는 탓이라 인정했다
또한 도미를 시샘하는 마음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대궐로 돌아오는 길로
개루는 도미를 대궐 건축을 잘못했다는 죄를 주었다
두 눈알을 뽑고 광나루 강으로 끌어다가
배에 태워 내쫓았다
앞 못 보는 도미는 무슨 죄를 지은줄도 모르고
하늘을 우러러 소리 내어 슬피 울면서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배에 실려 떠내려갔다
한편으로 아랑은
부전이를 달래서 개루의 침실로 들여보낸 뒤에
집을 벗어나 남의 집 처마 끝에서 밤을 지새우고
날이 훤하기 전에 도미의 소식을 듣기 위해
대궐 도편수를 찾았다
도미는 아직 대궐 안에 무사히 있다는 소식을 듣자
다소나마 가슴을 가라앉힌 지 반나절이 못 돼서
대궐에 들어갔던 도편수는
아랑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별을 전해 왔다
도미를 눈알을 뽑고 광나루 강물 위에 내쫓았다고
그리고 아랑이 자기 집에 있으면
자기 도편수까지 벌을 당할 테니
속히 다른 데로 피신을 해 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아랑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한시를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앞뒤를 헤아려 보지 않고
눈물을 머금은 채 광나루 강가로 쫓아갔다
젊은 여자
더욱이 아랑이 같이 뛰어나게 예쁜 여자가
사람의 눈에 띄기는 쉬운 일이었다
아랑은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붙들고
도미의 소식을 다 캐어묻기도 전에
배치되어 있던 개루의 군사에게 붙잡혀 버렸다
앙탈도 소용없었다
뿌리치고 달아나자니 힘이 모자랐다
아랑은 이내 대궐로 끌려갔다
으리으리한 대궐 화려한 전각 안에
아랑은 개루를 다시 대하게 되었다
네가 네 죄를 알겠니
개루의 목소리는 위엄스러웠다
아랑은 똑바로 개루를 쳐다봤다
눈에는 잠깐 살기가 떠돌았다
남편 도미의 눈알이 뽑힌 생각을 하니
아무리 단단한 마음씨라도
다리 팔이 가늘게 부들부들 떨린다
순간 아랑은 얼른 분한 생각을 물리쳤다
입 언저리에는 억지 미소를 띠었다
죽을 때라 잘못했사옵니다
가늘게 가늘게 떨리는 듯이 들렸다
개루는 다시 아랑을 대하고 보니
지난밤에 속았던 분한 생각도 봄눈 녹 듯 스러졌다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아랑이 더 귀여웠다
네 남편은 대궐 역사를 잘못 거행했기 때문에
죄를 얻고 형벌을 당해 바다 밖으로 내쫓겼다
앞 못 보는 장님이 산다면 며칠이나 살겠니
아마 오래지 않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아랑아 그래도 내 후궁이 되기 싫으냐
이제는 남편도 없고 의지할래야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간밤에 모시지 못하였지만
오늘 이 모양이 된 뒤에야
어찌 다시 대왕의 말씀을 거역하오리까
소근소근 하소연하는 듯
대답하는 아랑은 방울방울 눈물까지 흘렸다
개루의 넋은 아랑의 자태에 그대로 녹아 사라질 듯하다
물러가 있거라
궁녀 한 사람에게 호위되어
기운 없이 초연히 돌아서는 아랑의 뒷태도에는
만 가지 수심이 안개끼듯 어리었다
향기로운 젖물에 목욕하고
은마구리한 장도칼로 손톱 발톱을 곱게 다스린 아랑은
이 날 밤에 무명 옷을 벗어 버리고
칠보 화관 족두리에 궁녀의 복색 화려한 당의를 입고
나인에게 인도되어 궁중 깊고 깊은 복도를 거쳐
개루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연둣빛 당의
찬란한 붉은 치마에
금나비가 바르르 떠는 화관을 쓴 아랑의 때깔은
과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아름답다
관음 보살보다도 더 고왔고
옥계의 선녀보다도 더 예뻤다
촛불을 밝히고 비스듬히 안석에 의지해 있던 개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아랑을 맞았다
궁녀는 물러가고 인적은 고요했다
홍공단 이불 두 채가
화려한 봉황베개를 얹고 서리서리 펼쳐졌다
개루는 벌떡 일어나
그림같이 서 있는 아랑의 손길을 덥석 잡았다
앉아라
아랑은 개루에게 손을 맡긴 채 보시시 앉는다
아직도 도미의 생각이 나느냐
오늘 밤부터는 대왕의 사람이온데
그까짓 눈먼 천한 백성을 생각하면 무얼 합니까
아랑의 볼이 바시시 붉어지며 방싯 웃음을 머금었다 하얀 이가 꽃판 같은 입술 밑에 쫙 드러난다
이튿날 개루와 아랑은 느직하게 침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개루는 아랑과 사이에 한 금을 넘지 못했다
마침 수라가 들어왔다
아랑은 빈이 된 듯 모든 거행을 정성껏 받들었다
밖에 있는 궁녀들이 아랑을 정말 빈으로 받들었다
해가 기울고 다시 밤이 되었다
아랑은 침실에서 여전히 개루를 곰살궂게 받들었다
정말 아내가 남편을 대하듯이
그러나 몸때는 여전히 맑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다
다만 아직 한 금을 넘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다 개루에게 맡긴
아랑의 다른 뜻 없는 진선 진미한 태도는
개루의 경계하는 마음을 차츰차츰 풀어지게 하고야 말았다
개루는 손가락을 꼽아 다만 아랑의 몸 맑을 날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랑이 개루의 침실에서 묵은 지
이레째 되는 날 밤
아랑은 개루의 이불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벗어놓은 치마와 저고리 대신 개루의 옷과 바지를 입었다
머리에는 화관 대신 꿩 털 꽂힌 관을 얹었다
개루가 나다닐 때 군사에게 보이는 병부까지
단단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랑은 몇 번이나 개루의 코 고는 소리를 시험해 보고
방문을 연 뒤에 토끼처럼 바시시 빠져 나갔다
이레를 두고 보살펴 익혀 둔 길이라 막힐 것이 없었다
임금이 거처하는 곳의 문인 지밀문을 벗어난 아랑은
마지막 큰길로 나가는 문인 대도문에 이르자
파수지기 군사에게 말없이 병부를 내보였다
대궐 문이 열려졌다가 스르르 닫혔다
마침내 아랑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랑은 두 주먹을 쥐고 광나루로 달음질친다
나룻가에서 아랑은 또다시 병부를 보이고
사공을 재촉해서 배 한 척을 얻었다
아랑은 이레 전에 남편 도미가 떠내려간 곳을 따라
물결이 흐르는 대로 배를 저어 흘러간다
해가 훤히 동천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할 때
아랑의 배는 양화도를 지났고
한낮이 겨워서는 강화도 갑고지물에 닿았다
군데군데 갯가 사람들에게
이레 전에 지나간 눈먼 도미의 종적을 물으니
도미는 강화 쪽을 향하여 흘러간 것이 분명했다
아랑은 뭍에 올라 또다시 사공들을 붙들고
눈 먼 도미의 지나간 방향을 물으니
한 사람의 사공이 며칠전에 눈먼 거지 장님을 보았다한다
아랑의 가슴은 탈 듯이 조여졌다
뒤에는 개루의 쫓는 군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 무서웠다
앞으로는
얼른 도미를 못 만나는 것에 마음을 졸였다
아랑은 또다시 배를 저어 승천포로 흘러갔다
해는 다시 강 너머 사산으로 꺼지고
첫 가을 바람은 우거진 갈대 잎을 휘날릴 때
승천포 포구 앞에는
갈대 피리를 불고 앉은 거지 장님이 있었다
아랑은 가슴이 출렁 떨어졌다
배를 버리고 단숨에 땅 위로 뛰어올랐다
구슬피 해 떨어지는 서풍에
갈대 피리를 불고 앉아 있는
장님 거지는 갈 데 없는 남편 도미였다
도미
아랑은 도미를 껴안았다
구슬피 피리를 불고 앉았던 도미는
귀 익은 목소리에 놀라 알맹이 없는 눈을 휘번득거렸다
도미 나야 아랑이야
아랑의 두 뺨엔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뭐 아랑
도미는 더듬더듬 아랑의 몸을 찾았다
도미가 아직도 촉각의 기억이 새로운
아랑의 손을 잡았을 때
어떻게 찾아왔어
그래도 나를 안 버렸어
도미는 겨우 한 마디를 마치고
동자 없는 눈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몇 달 뒤 백제 서울에는 아랑의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아랑이 눈먼 도미의 손을 이끌고
원수의 백제 땅을 영영 버린 뒤에
거지가 되어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