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서른 번째-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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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서른 번째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자꾸 터져 나오는 울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한 남자가, “이것봐요. 저...” 하고 말을 시키려 하자 다른 남자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나둬.”라고 만류했다. 또 어떤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지시를 내렸다.
“발 좀 편하게 양말을 벗기지 그래. 기내 실내화를 신겨.”
그 말이 떨어지자 누군가 둘이서 달려들어 내 양말을 벗기고 덧버선으로 갈아 신겼다. 나는 인형처럼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내 몸을 건드리지도, 말을 시키지도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을 감고는 있었으나 곁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잔뜩 긴장하여 온몸의 신경 조직을 곤두세웠다. 남조선에 가서의 대책도 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해야하나?' 멍청하게도 그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이었다. 얼마쯤 지나 누군가가 내 손을 펴며,
“훈련을 받은 손이 틀림없어. 오래 지나면 풀리니까...”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더럭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손을 오므리고 주먹을 꼭 쥐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특무들이 계획적으로 그런 말을 해 내 반응을 살핀 것이었다. 내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면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고 알아듣지 못하면 별 반응이 없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나는 손을 오므렸고 그때부터는 주먹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남조선 특무들은 내 반응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손에 대해서 더 말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해 다행이라고 넘겼다.
비행기는 이미 이륙하여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도 구명복에 대한 설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나를 끌고 가기 위한 특별 전용기인 모양이었다.
내가 위조 일본 려권을 가지고 있었고 공항에서 자살을 하려 했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남조선 려객기 KAL기 폭파범이라는 뚜렷한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이렇게 큰 비행기를 이 먼데까지 보내다니....
‘남조선은 돈이 많은 나라인가? 아니면 내가 북조선에서 임무를 맡고 KAL기를 폭파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특별 전용 비행기를 보낸 데 대한 해답이 나로서는 얼른 잡히지 않았다. 북에서는 외국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달나라에 갔다 온 사람처럼 부러워한다.
“야, 비행기를 다 타보고 출세했구나. 난 언제나 비행기를 한번 타보 갔나? 어디 걸리는 데가 있어야지.”
‘걸리는 데' 라는 말은 김일성의 친족이나 인척에 관련이 있느냐는 뜻으로 ‘빽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럴 정도로 비행기에 대해 귀하고 엄청나다고 생각하는 북조선에서 자라 온 내가 나 때문에 대형 특별기를 동원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일어로 “어디 불편한 데는 없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갯짓으로 없다고 의사표시를 했더니 나이든 목소리가 내 옆의 여자를 꾸짖었다.
“일어로 묻지 말어!”
그 지시를 받고부터 이들은 무엇이든 조선말로만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들이 조선말로 말할 때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면서 일체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선 말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크나큰 장애물이 될 줄은 몰랐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