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일곱 번째-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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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일곱 번째
어제밤에는 꿈도 없이 푹 잘 잤고 아침에는 목욕까지 해서 그런지 정신도 한결 맑아지고 원기도 상당히 회복된 듯했다.
수사관들은 오늘이 대통령 선거 날이라며 아침부터 교대로 투표를 하고 왔다. 투표하고 온 수사관들은 아직 투표하지 않은 수사관들에게 빨리 가서 하라며 근무를 교대해 주었다.
“미스 김은 누구 찍을거야?” “내 주권 내가 행사하는데 그건 왜 물어요? 누구를 찍든 내 자유죠. 언니는 누구 찍었는데요?” “우리 집은 여자와 남자가 완전히 파가 갈렸어. 나는 당연히 여자들 쪽 편을 들었지.”
이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빨리 와 닿지 않았다. 누구를 찍든 자유라든가, 집안에서는 파가 갈렸다든가 하는 말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남조선은 참으로 복잡하고 무질서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군, 우리 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같은 탁월한 령도자를 모셨기 때문에 의견이 일치된거야. 모두 한 분만 우러러 모시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령도자 하나 뽑는 일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니 무엇인들 단합이 되겠는가 싶어 남조선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자기들 스스로 결정하는 제도 밑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놀라기도 했다. 그들이 나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잡담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흘려버리는 잡담에 내 마음이 흔들리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점심식사 때도 역시 죽이 나왔고 반찬으로는 김이 나왔다. 나는 완벽하게 중국인으로 연극하기 위해 일부러 김을 처음 먹어보는 척 능청을 한 번 떨어봤다.
“종이를 태운 것이에요? 어떻게 먹지요?”
수사관들은 내가 묻는 중국말에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또 다른 꼬투리가 잡힐까봐 더 이상 묻지 않고 지나갔다.
그들은 남산에 데리고 온 지 이틀 동안은 나를 쉬게 하고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으나 나의 일거일동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조선말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알아들으면서도 못 알아듣는 척하고 연극을 하다나니 등에서 진땀이 나고 내 쪽에서 오히려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반면에 수사관들의 말과 행동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어떤 젊은 수사관들은 죄인인 나에게 존대까지 써가며 말을 건넸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그동안 듣고 상상해 오던 그런 분위기와는 완전 백팔십도로 달랐다. 그것이 그들의 계산된 연극이었다면 그 연극은 너무나도 완벽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구석에도 연극이라는 느낌은 털끝만큼도 엿보이지 않았다. 내 계산과 남조선에서의 실지 상황이 완전히 빗나가자 나는 내가 처신해야 할 행동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울 수도 없게 되었다. 그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이 섰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자꾸만 내 앞에 터지니 나로서도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편이었다. 과연 북에서 남조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남조선 특무들이 날 의식해서 특별하게 굴고 있는 것인지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철없는 중국인 행세를 하려고 온갖 기지를 다 발휘해 보았다. 모든 것이 바레인에서보다 열배 스무 배 힘들었다. 바레인에서는 서로가 다 외국인이었으므로 그들끼리의 대화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부터는 수사관끼리 늘어놓는 담화 내용이 모두 조선말이기 때문에 안 들으려고 애써도 자연히 귀가 기울여져 신경이 쓰였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