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두 번째-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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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두 번째
넘어야 할 태산은 많은데 아무런 방도도 없이 걱정만 하고 있자니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같았다. 잠시라도 이를 잊기 위해 빨래 잔치를 한바탕 벌였다. 온몸에 땀이 났다. 빨래를 끝낸 뒤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목욕을 했다. 조금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가가 짓물러 있었다. 어제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식사가 끝나기가 바쁘게 다시 조사가 시작되었다. 수사관의 질문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먼저 어제 말한 부분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젯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 보았던 테레비는 일제 히다찌 제품이었습니다. 신이찌가 나에게 쯔쯔지에 대해 말해 준 것이 인상깊게 남아서 ‘쯔쯔지'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는 듯이 보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은 건성건성 넘어갔다. 그들은 똑같은 질문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묻고, 다시 확인하고,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고, 종이에 적어 보라고 하며 사람을 질리게 했다. 거짓을 둘러대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조사를 받는 일은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었다. 그런 어려운 일에 되지도 않는 거짓말까지 엉성하게 둘러대고 있으니 될 일이 아니었다. 말이 막힐 때마다 내 꼴이 처참하게 생각되어 울고 또 울었다. 울다가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놈들이 아무리 그래도 증거는 없으니 어쩌겠는가. 나만 잘 버티면 된다. 고비를 넘기자.' 하고 정신을 가다듬기도 수차례였다.
수사관들의 질문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세세한 부분까지 파서 물어댔다.
“신이찌로부터 매달 받은 급료는 얼마였지? 그중에서 얼마를 저축했으며 저축한 돈은 어디에 두었어?” “예금을 했다면 어느 은행인가? ” “나리따 공항에 나갈 때는 무슨 차를 타고 나갔지? 택시를 탔다면 좌석 배치는 어땠어?” “나리따 공항 건물은 무슨 색이며 몇 층 건물인지 말해봐. 또 이층을 오를 때와 비행기를 타러 갈 때는 무엇을 탔지?” “광주에 오래 있었다면 ‘싸멘' 이라는 곳엔 가보았는가? 정말이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만 골라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이중에서도 일본의 택시 이야기를 하는 중 운전기사 좌석을 반대로 말했다가 수사관에게 자꾸 거짓말할 거냐고 호통을 맞았다. 또 광주 싸멘에는 북조선 무역 대표부가 있는 곳이어서 괜한 구실을 잡힐까봐 지레 겁을 먹고 가보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랬더니 수사관은 광주에서 몇 년 동안을 있었다면서 젊은이들의 산보 장소로 유명한 그곳을 안 가봤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야단을 쳤다. 누가 들어도 내 대답은 모순 투성이었다.
“안 가 본 곳을 억지로 가 보았다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나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사관이 백지를 주며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잠시 뒤에 그 수사관은 백지 여러 장을 손에 들고 와서 내 앞에 내놓았다. 그것을 받아서 들여다보니 조금 전 내가 적어준 내 이름자였는데 사진을 찍은 것처럼 여러장으로 되어있었다. 어느 이름자는 깨알처럼 작아져 있었고 어느 이름자는 문패마냥 커다래져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자세히 눈을 닦고 들여다보아도 작은 글씨나 큰 글씨나 모두 내가 써준 글씨가 틀림없었다. 단지 크기만 다를 뿐이었다. 너무나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금세 글씨를 크게 만들기도 하고 작게 만들기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똑같이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텐데 요술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잠시 뒤에 설명을 들어보니 복사기라는 기계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