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여덟 번째-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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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여덟 번째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는 바로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사와서 먹어가며 잡담을 벌였다. 여유작작한 모습들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서울이 얼마나 잘 살길래 즐기는 이야기뿐인가 하여 선전이겠지 하는 의심마저 품었다.
잡담이 끝나자 어느 남자 수사관이,
“오늘 서울 구경이나 나가지. 나갈 때 입을 옷을 사 놓았는데 맞는지 입어봐.” 라고 하며 책상위에 옷을 벌여 놓았다. 검정 투피스, 잠바, 스웨터 등이었다. 새 옷을 이렇게 많이 받아 보기는 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에서는 옷 한 벌 구하려면 돈이 있어도 뒷거래가 아니면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힘들다. 학생들에게는 몇 년마다 한번씩 4.15 김일성 생일이나 2.16김정일 생일 때에 맞춰 수령님의 선물이라며 새 교복을 살 수 있는 구매권을 주었다. 학생 때 새 교복이 나오면 너무 좋아서 얼마 동안은 마음대로 앉지도 못했다.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초대소에 들어간 다음 날 평양 시내 교예극장 부근에 있는 ‘금수산 양복점'에서 양장 한 벌을 맞추어 주었다. 그때 난 과연 공작원이 특수하다더니 좋긴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옷을 맞추고 돌아와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도 지루했다. 옷을 찾아온 날은 얼마나 기쁜지 밤잠을 설치며 입어보곤 했던 적도 있었다. 북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이 모두 김일성의 배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원수님이 주신 교복 정말 좋아요 이른 아침 번창한 네거리에서 공장가는 아저씨께 인사했더니 멈춰서서 하는 말 웃으시며 하는 말 너희들의 새 교복이 정말 곱구나 아ㅡ 좋아요 정말 좋아요 원수님이 주신 교복 정말 좋아요
수사관들이 사다 준 옷을 입어보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은 즐거운 마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하게도 나는 그 귀한 새 옷도 외출도 다 귀찮은 마음뿐이었다. 제발 나를 심문하지도 말고, 새 옷을 사 주지도 말고, 서울 시내 외출도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내 이야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외출을 하자니 이놈들이 필시 내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는 거야' 하고 깨달았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이야기를 다 끝내야 속이 편할 성 싶어 자청해서 이야기를 마저 다 하겠다며 입을 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로 갔습니다. 바그다드 공항 안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다른 비행기를 탔는데 그 비행기에는 남조선 승무원과 남조선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어서 그때 남조선 비행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북조선에서 온 신이찌가 한국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별로 거기에 신경쓰지는 않았습니다. 비행기에는 보통석 좌측 두 번째 줄에 앉았는데 내가 2번에 앉고 신이찌는 3번 그리고 서양 여자가 1번에 앉았습니다. 비행기가 떠오를 때는 밤이었으며 신이찌는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있었습니다. 기내식이 끝난 뒤 1번에 앉아 있던 서양 여자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기에 나도 가고 싶던 터여서 화장실을 갔습니다. 용무를 보고 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신이찌가 양복을 입은 채로 화장실에 갔다가 10여분 후에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 전부입니다.”
나는 이야기를 끝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수사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시내 외출을 다녀와서 내 이야기를 하겠다. 어디가 거짓말인지 하나하나 지적해서 말할테니 우선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을 다녀오도록 하지.”
그런 말을 듣고 나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