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스물 두 번째-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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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스물 두 번째
북조선에서는 사진을 찍으려면 꼭 사진관에 가야만 한다. 사진기가 있는 가정은 그리 많지 않다. 사진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필림 구하기가 어렵고 현상하려면 사진관에 가 아는 사람을 붙들고 사정 사정해야 뒤구멍으로 해주는 형편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사진기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우선 접수에 크기 호수에 따라 돈을 지불하고 사진 촬영표를 받아 사진을 촬영하면 7~8일 후에 나온다. 사람이 많은 때는 10일이 넘어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 색사진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 당시에 색사진은 대성구역에 있는 사진관에서 그려서 색을 넣어 주었다. 손으로 자주 만지면 색이 번지고 오래 두면 색이 바래는 수준이였다.
명함판 사진 6장을 만들어 3장은 지도원이 가지고 가고 나머지 3장은 기념으로 내게 주었다. 나는 이 사진을 집에 가지고 가서 식구들에게 오늘 찍어서 바로 만들어 온 사진이라고 자랑을 했다. 식구들은 모두 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야 , 중앙당에서는 정말 안되는 일이 없구만.” 하고 감탄하였다.
다음 날은 학교 간부과에서 신체검사표를 받아 평남도 평원에 가서 종합신체검사를 받았다. 역시 산부인과에서 처녀성 검사까지 받았다. 그날 바로 나온 결과는 모두 신체검사표에 기재되였으나 혈액검사, 변검사, 렌트겐 촬영 결과는 후에 지도원이 받아가게 되여 있었다.
3월달에 접어들면서 김일성 생일을 앞두고 행사준비에 바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일요일도 없이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일을 보았다. 그런데 나는 담화를 한다, 사진 촬영이다, 신체검사다 하며 수업에 자주 빠지고 소조 활동을 소홀히 하다 보니 소조원들은 물론 나를 아는 학교 동무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신체검사가 끝난 뒤 얼마 동안은 부르지 않아 다시 전과 같이 학교 공부에 열중하고 소조일도 열심히 보게 되였다.
3월 29일, 이날도 토요일이였지만 나는 저녁 8시까지 연구실 소조원들과 ‘김일성 혁명력사 연구실'에 있었다. 연구실 관장 선생이 나에게 당위원회 사무실에서 전화왔는데 당비서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했다. 당비서 방으로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전에 담화 할 때 몇 번 본 중앙당 정 지도원이 와 있었다. 당비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김현희 동무는 중앙당에 소환되였소. 중앙당에 뽑혀 가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김현희 동무가 뽑혔다는건 동무 자신에게도 영예로운 일이지만 우리 학교로 보아서도 영광스러운 일이오. 진심으로 축하하오.”
당비서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져 있는데 정 지도원이,
“내가 선생들에게 김현희 동무의 이동 문건 떼는 것을 다 지시해 놓았으니 동무는 소지품을 모두 꾸려 현관 앞으로 나오시오.” 하고 재촉했다.
나는 얼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도 저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니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당에 소환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연구실의 내 소지품을 모두 챙겼다. 소조원들은 짐을 챙기는 나를 눈이 휘둥그래져 쳐다보며,
“갑자기 무슨 일이가? 어데 동원? 중앙당 사람들과 담화하더니......”하며 물었다. “응, 나두 잘 몰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소조원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들의 선망에 찬 시선을 등뒤로 받으며 서둘러 현관을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한동안 고락을 같이 나누며 정들었던 소조원 동무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나던 일이 눈물이 솟구칠 정도로 후회된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