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마흔 여덟 번째-216
눈물의 고백, 마흔 여덟 번째
쿠바에서 북조선대사관 성원들의 가족 숙소는 대사관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혁명 이전에 어느 부르조아가 살던 호화로운 저택을 정리하여 사용했다. 우리가 그 집에 입주할 때는 문 앞에서부터 각종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다. 그 후 부르조아의 잔재를 청산한다 하여 고급 조각품과 화려한 장식품을 모두 부수어 버리거나 깨어 버렸다.
나도 그 집 구조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 집의 문은 커다란 철창살로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탁 트인 정원과 곧바로 만난다.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정원에는 조명 등도 설치되어 있었고 그네도 있었으며 하얀 탁자와 의자는 잔디의 새파란 색깔과 대조를 이루어 더한층 빛났다. 정원을 내려다보며 자리 잡은 우아한 3층 건물이 우리 숙소였다. 나는 워낙 어린 탓에 멋모르고 쿠바 생활을 했지만 어머니는 쿠바에서 살던 시절을 꿈 같은 생활이었다고 가끔 회상하곤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풍족한 생활과 자유로운 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취사를 할 때도 가스 불을 사용했고 부식물과 간식거리는 며칠에 한 번씩 오는 식료 공급차를 이용하거나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서 구입했다. 시장에 가서 각종 과일을 사기도 하고 상점에 가서 물건을 골라 바구니에 넣어 계산대에서 물건 값을 지불하기도 하면서 편리한 생활 질서에 행복해 했었다.
나 역시 그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조국에서 성장하면서 쿠바에서의 시절이 꿈같은 생활이었다는 어머니의 표현에 수긍이 갔고 동감이었다. 쿠바에 살 때 나는 ‘쵸코렛 대장'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쵸코렛을 노상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치아가 좋지 않다.
정오 때쯤 되면 우리 집 앞으로 얼음과자를 파는 냉동차가 지나가는데 그 차 소리만 나면 엄마한테 동전 몇 닢을 받아들고 뛰어나가 엘라데로 하며 쿠바말로 얼음과자를 외치며 아이스크림을 사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인 양 당연한 생활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가족 동반의 외교관 연회가 종종 열렸다. 나는 연회복을 예쁘게 차려 입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아버지와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서곤 했다.
“우리 현희는 복도 많지. 이런 좋은 환경에서 클 수 있으니...”
어머니는 나에게 옷을 입히면서나 머리를 빗겨 주면서 늘 흐뭇해하였다. 연회장에 가면 종이껍질 채 먹는 사탕을 입에 넣고 종기가 입안에서 녹는 것이 신기하여 자꾸만 먹어보던 일도 기억난다. 또 연회에 참석한 흑인, 금발의 백인 등 외국 사람들의 생김새를 호기심에 가득 차 뚫어져라 바라보던 일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쿠바 접대원들이 나를 안아 보려고 서로 앞 다투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파티가 끝날 때쯤이면 참가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나이와 키에 따라 크기가 각기 다른 인형을 주었다. 나는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자가서 언제든지 작은 인형이 내 몫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섭섭하고 속상해 집에 돌아와서는 시무룩해 있는 일이 많았다. 어떤 때는 연회에서 남은 열대 과일을 내 체격만큼이나 큰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끙끙거리며 끌고 올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도 성격이 알뜰하고 악착같은 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 1층에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학교 시절 배운 실력으로 나에게 피아노를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보지 못했다. 북에서는 가정집에 피아노를 들여 놓는다는 것은 꿈꾸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문적으로 그 계통으로 나가지 않는 한 피아노를 만져 보지도 못한다.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 쿠바였고 쿠바의 생활은 어머니의 말대로 행복 그것이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