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아홉 번째-207
[...]
눈물의 고백, 서른 아홉 번째
“할아버지, 약을 먹을 순간이 오면 신호해서 같이 행동해야 해요. 아지 제가 먼저 깨물테니 확실히 죽었는가를 확인하신 후에....” 김 선생은 깊은 상념에 빠져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역시 자기의 가족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당겼다. 조금 뒷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혁명도, 투쟁도, 꿈도, 영광도...
나는 눈물들 닦고 영웅답게 죽어야 할 순간을 기다리며 김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바레인 경찰관 4~5명이 우리를 에워싸고 그곳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김 선생과 나를 분리시키고 짐 검사와 몸수색을 시작했다. 여자경찰들은 어찌나 까다롭게 검색하는지 화장품 속은 물론 내 몸 전체를 머리카락 한오라기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샅샅이 검사했다. 몸수색과 짐 검색을 받으며 수치감보다는 말보로 담배가 들어있는 맬가방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여자경찰들은 걱정하던 말보로 담배에 대해서는 별 문제 없이 지나쳤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등줄기에 흥건히 땀이 흘러내렸다.
검색을 마치고 멜가방을 메고 다시 공항에 홀로 나와보니 김선생은 먼저 검색을 끝내고 바레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선생은 나를 보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독약 앰플은 무사하냐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수하여 무사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김 선생은 다행이라는 듯 다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가 앉자 그는 여행 중 피우던 일본제 세븐스타 담배 1개비를 내게 권해 왔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나에게 담배를 권한 이유는 내가 평소 담배를 피우는 사람임을 인식시켜 앰플이 들어있는 담배를 깨물 시기가 오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김선생의 의도를 금방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더 나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려고 멜가방에서 라이타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내 가방 안의 말보로 담배갑을 검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 여경찰이 갑자기 내 멜가방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재빨리 말보로 담배갑만 꺼내고 멜가방을 넘겨주었더니 여경찰은 담배갑도 마저 달라는 시늉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나는 다시 담배갑에서 담배 가루로 표시된 앰플 담배개비를 골라내고 담배갑을 주었다. 그들이 의심을 품든 말든 그것만은 빼앗길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지금 독약 앰플 담배는 유일한 구원의손길이었다.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여태까지 애써 수행한 과업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그 상황에서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이었으므로 앰플 담배는 내 손안에 있어야만 했다.
내가 그 담배 한 개비를 빼들자 여경찰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을 벌렸다. 그 담배도 다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김 선생에게 구원을 청하려고 그를 쳐다보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절대 빼앗기지 말라고 신호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사태가 악화되어 버렸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김 선생에게서 눈을 떼었다. 이러는 사이에 여경찰이 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다급한 정황 속에서 나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에 넘어간 담배를 낚아채어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필터 앞부분을 콱 깨물었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담배를 깨무는 순간 여경찰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덮쳐 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이미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캄캄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훈련견 처럼 잘 길들여진 김일성의 충성스러운 딸은 이때 죽었다. 모든 것은 다 끝났다. 독약 앰플을 깨무는 순간 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캄캄한 어둠이 나를 덮쳤고 그리고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