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일곱 번째-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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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일곱 번째
북조선 대학생들은 학교를 자체적으로 지킨다 하여 보초도 서야했다. 적이나 간첩으로부터 시설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걸지만 사실은 도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외국어대학은 정문, 본청사, 접수, 2호청사 기숙사, 3호청사, 그리고 ‘김일성 동지 혁명력사 연구실' 등 6개 초소에서 보초를 섰다. 보름에 한 번 학교 근무표를 짜는데 당번이 되는 날이면 한 사람이 2시간 근무하고 교대하여 하루에 3번 보초 근무를 서게 된다. 만일 근무 중 책을 읽는다거나 자리에 앉아 있다가 발각되면 비판 무대에 올려져 망신을 당했다.
저녁 7시에 근무 교대를 하므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다음 날 아침과 점심에 먹을 밥곽2개를 싸가지고 와야했다. 추운 겨울밤에는 솜동복과 솜신을 껴입고 그 위에 또 군복을 걸치기 때문에 걷기조차 불편할 정도로 행동이 둔해진다.
학교 근무 당번이라든가 예술 써클강좌든가 하는 활동은 학교 내 과업이지만 이런 과업 이외에 대학생들 역시 모내기와 가을걷이는 물론 교내 식당용 김장거리를 심고 거두는 일까지 하며 수시로 국가적으로 벌이는 건설장에도 동원된다.
대학생은 각종 건설장에서 ‘돌격대'라는 호칭을 붙여 일을 세게 시킨다.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면 연도행사에 동원되며 김일성 생일은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무도회를 하면 한복으로 차려입고 나가 무도회 춤을 추어야 했다.
이렇게 여기저기 동원되다나면 학과 공부는 몇 개월씩 진행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그나마 나는 우리 학교 ‘김일성동지 혁명력사 연구실' 소조원으로 뽑혀 여러 가지 작업 동원에서 빠질 수가 있었다. 연구실 소조는 대학 사로청 조직에서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학교 생활에 성실한 여학생 10명을 선발하여 운영했다. 어느 학교나 다 이 김일성 혁명력사 연구실을 꾸려 학생들로 하여금 직접 관리하게 하였다. 이 연구실은 신성시되는 곳이므로 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곱게 치장하여야 한다.
학교마다 서로 이 연구실을 잘 꾸리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 연구실 소조 조직은 학교 사로청의 직속 조직으로 사로청의 지시만을 받는다. 소조원이 되기 힘들지만 일단 소조원으로 선발되면 모내기, 추수 등 모든 작업 동원에서 제외된다. 오로지 연구실 꾸리는 데만 전념하라는 뜻이다.
우리 대학의 연구실은 김일성관이 5개 관이고 김정일관, 김정숙관까지 7개 관으로 되어 있는데 방 하나에 소조원 한 사람씩 담당이 정해지는데 소조원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등교하여 연구실을 청소하고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시킨 다음 비품과 전시물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서 소조 부위원장의 진행으로 약 15분간 아침 독보를 하게 되는데 주로 노동신문 사설을 읽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낮동안 사용한 방을 대청소 한다. 위생 검열을 해서 티 하나 묻어 나오지 않도록 깨끗이 해야 한다. 간혹 연구실에서 회의가 길어져 늦어질 때도 있었다. 청소가 끝나면 자물쇠로 잠그고 도장 찍은 종이로 봉한다. 학생들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간다. 결국 집에서는 잠만 자고 하루 전부를 학교에서 보내는 셈이다.
방학 때가 되어도 연구실 소조원은 학교에 나가 연구실을 꾸렸다. 연구실 소조원이 아니더라도 대학생들은 방학 기간 동안 ‘학교 근무 당번', ‘ 생활총화', ‘외화벌이 사업', ‘선전 활동' 때문에 절반 이상을 학교에 나가야 한다. 또 가공 건설장에 동원되기도 해서 특별히 방학이라고 해서 하고픈 일이나 하며 푹 쉬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