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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일곱 번째-7

나의 어린시절, 일곱 번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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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일곱 번째 음악 써클을 담당한 ‘김신애' 선생은 당시 28살 정도 된 눈이 새까맣고 잘 생긴 처녀였다. 그 녀선생은 나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며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끌어안고 지도할 정도였다. 그 선생님은 나를 좋아해서 그랬겠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민망스럽고 쑥스러워서 마음도 불편했다. 어머니로부터 항상 얌전치 못하다는 꾸중을 듣고 자라서 그랬는지 학교에서는 얌전하고 예절 바른 애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얼마 뒤 로영란이라는 24살 정도의 처녀선생이 음악 선생으로 와서 김신애 선생과 함께 지도하다가 김신애 선생은 곧 다른 곳으로 조동되여 갔다. 새로 온 노영란 선생 역시 김신애 선생과 같이 음악에 소질이 있고 아주 미모의 얼굴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다. 그 녀선생은 6남매 중 막내로 자란 데다가 얼굴까지 반반한 탓인지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도도해서 남들이 그 녀선생을 피했다. 로영란 선생 역시 나에게 잘해 주었기 때문에 곧 친숙해졌다. 그 녀선생을 만나면 나는 집안이야기, 동무 이야기, 엄마 이야기 등 화재가 풍부해져 재잘재잘 별 소리를 다 할 정도였다. 로영란 선생도 자기 동무들 만나러 갈 때나 시내에 볼일 보러 갈 때는 늘 나를 장식품 마냥 달고 다니며 귀여워하고 좋아했다. 이처럼 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다나니 음악 소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나는 각종 공연에 뽑혀 다녔다. 2학년 때에는 혼성 제창의 일원으로 텔레비죤에도 출연했다. 그때 부른 노래는 ‘호박대가리' 라는 노래인데 이것 역시 김일성의 항일 투쟁 중 가장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보천보전투'의 전승을 익살맞은 내용의 가사를 지어 노래한 것이였다. 와 하하하 골탕 먹은 왜놈들, 간삼봉 전투에서 쫄딱 녹았네, 김장군이 이끄는 전투에서 혼이 난 왜놈들, 혼비백산 도망가는 저 꼴 좀 봐요, 달구지 몰이에 동원된 한 인민이 물은 말, ‘저, 나리님, 이 자루 속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보면 모르는가, 호박대가리야 호박대가리.' 오 하하하 신나는 간삼봉 전투 승리, 우리 유격대에 왜놈들 쫄딱 녹았네 대충 이러한 노래말로 된 것이다. 우리는 그 노래를 너무나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3학년 겨울. 청년학생축전에 우리 하신인민학교와 동대문인민학교가 각 10명씩 뽑아 인민학교 대표로 공연하게 되였다. 그 공연은 김일성을 모시는 공연이라 하여 온통 법석을 떨었다. 우리가 부르고 연주할 곡명은 ‘원수님이 주신 새 교복 정말 좋아요 ' 라는 노래로 교원대학 학생 손풍금 합주단 500명과 같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였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불렀다. 련습은 약 두 달간 계속되였다. 추운 겨울, 뻐스와 전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대동강 다리'를 걸어 건너서 교원대학으로 갔다. 련습이 끝나는 시간은 밤 12시나 1시쯤이였다. 혹독하게 추운 그 겨울 밤에 또다시 집으로 돌아갈 일이 끔찍스럽고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어서 집으로 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집을 향해 떠나면 버스 정류소에서 발이 시려 발을 동동 구르는 날이 허다했다. 두 달간 매일 그 짓을 되풀이 하면 서도 그것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거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 항상 가슴 아파하셨다. 교원대학에서 련습이 끝나자 장소를 소년궁전과 대극장 무대로 옮겨 시연회를 가졌다. 시연회 역시 20회 이상 진행했는데 이를 위해 보름 동안 참가자 전원이 학생려관에서 합숙했다. 이처럼 집중적인 훈련을 하고 나니 완전히 기계처럼 되였다. 선잠이 든 상태라도 전주곡만 울리면 아무 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노래 할 정도였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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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일곱 번째-7 Meine Kindheit, Siebte - 7 My Childhood, Seventh - 7 Мое детство, седьмой - седьмо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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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일곱 번째  음악 써클을 담당한 ‘김신애' 선생은 당시 28살 정도 된 눈이 새까맣고 잘 생긴 처녀였다. ||||||||||||||jet black||| In my childhood, Mr. Kim Shin-ae, who was in charge of the seventh music circle, was a black and handsome virgin who was about 28 years old. 私の幼い頃、7番目の音楽サークルを担当した「キム・シンエ」先生は、当時28歳くらいの真っ黒な瞳のハンサムな処女でした。 그 녀선생은 나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며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끌어안고 지도할 정도였다. |||||||||||hugging|| Her teacher saw me and said she would die cute enough to hug and lead me in front of other children. その先生は私を見て可愛がって、他の子供たちが見ている前で私を抱きしめて指導するほどでした。 그 선생님은 나를 좋아해서 그랬겠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민망스럽고 쑥스러워서 마음도 불편했다. |||||||||embarrassed|| その先生は私のことが好きだったのでしょうが、私は他の子供たちに恥ずかしくて恥ずかしくて、気持ちも不快でした。 어머니로부터 항상 얌전치 못하다는 꾸중을 듣고 자라서 그랬는지 학교에서는 얌전하고 예절 바른 애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I received a lot of praise from my mother for being a gentle and polite kid at school. 母親からいつもやんちゃだと叱られて育ったせいか、学校ではやんちゃで礼儀正しい子だとよく褒められました。 얼마 뒤 로영란이라는 24살 정도의 처녀선생이 음악 선생으로 와서 김신애 선생과 함께 지도하다가 김신애 선생은 곧 다른 곳으로 조동되여 갔다. |||||young female teacher|||||||||||||transferred| その後、ロ・ヨンランという24歳くらいの処女の先生が音楽教師として来て、キム・シンエ先生と一緒に指導していたが、キム・シンエ先生はすぐに他の場所に移った。 새로 온 노영란 선생 역시 김신애 선생과 같이 음악에 소질이 있고 아주 미모의 얼굴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다. ||Noh Yeong-ran|||||||||||||||| The new teacher, Roh Young-ran, also attracted the attention of men because he was very talented in music and very beautiful face like Kim Shin-ae. 新しく来たノ・ヨンラン先生も、キム・シンエ先生と同じく音楽に長けていて、とても美貌の顔なので、男性陣の注目を集めた。 그 녀선생은 6남매 중 막내로 자란 데다가 얼굴까지 반반한 탓인지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도도해서 남들이 그 녀선생을 피했다. ||||||||pretty|perhaps||||proud||||avoided The teacher grew up to be the youngest of the six children, and because of her smooth face, she was proud of her pride and her personality. 彼女先生は6人兄弟の末っ子として育った上に、顔まで真っ白なせいか、プライドが高く、性格も強烈で、みんなから敬遠されていた。 로영란 선생 역시 나에게 잘해 주었기 때문에 곧 친숙해졌다. ||||||||became familiar ロ・ヨンラン先生も私によくしてくれたので、すぐに親しくなりました。 그 녀선생을 만나면 나는 집안이야기, 동무 이야기, 엄마 이야기 등 화재가 풍부해져 재잘재잘 별 소리를 다 할 정도였다. |||||||||||||chatter|||| When I met her, I had a lot of fire, such as family stories, companions 'stories, and mothers' stories. 彼の先生に会うと、私は家の話、同志の話、お母さんの話など、火がつき、おしゃべりに花が咲くほどだった。 로영란 선생도 자기 동무들 만나러 갈 때나 시내에 볼일 보러 갈 때는 늘 나를 장식품 마냥 달고 다니며 귀여워하고 좋아했다. When I went to see my comrades and to see the city, I always wore me like ornaments and loved me. ロ・ヨンラン先生も自分の仲間と会いに行く時や、街に用事がある時はいつも私を飾り物のように付けていて、可愛がってくれて好きだった。 이처럼 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다나니 음악 소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나는 각종 공연에 뽑혀 다녔다. ||||favor||||||||performances|| こうして2人の音楽教師から寵愛を受けると、音楽の素質が多少劣っていても、私は様々な公演に抜擢されるようになった。 2학년 때에는 혼성 제창의 일원으로 텔레비죤에도 출연했다. 2年生の時は、混声合唱のメンバーとしてテレビにも出演した。 그때 부른 노래는 ‘호박대가리' 라는 노래인데 이것 역시 김일성의 항일 투쟁 중 가장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보천보전투’의 전승을 익살맞은 내용의 가사를 지어 노래한 것이였다. |||pumpkin head||||||anti-Japanese||||||Battle of Pochonbo||humorous||||| In the second grade, he also appeared on TV as a member of the mixed-language program. その時歌ったのは「琥珀大理」という歌で、これも金日成が抗日闘争の中で最も誇りに思っている「宝泉坊戦」の戦功を揶揄した内容の歌詞を付けて歌ったものだった。 와 하하하 골탕 먹은 왜놈들, 간삼봉 전투에서 쫄딱 녹았네, 김장군이 이끄는 전투에서 혼이 난 왜놈들, 혼비백산 도망가는 저 꼴 좀 봐요, 달구지 몰이에 동원된 한 인민이 물은 말,  ‘저, 나리님, 이 자루 속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hahaha|soup||Japanese|gansambong||completely|||leading|||||in a state of panic||||||cart|driving|mobilized|||||||||||| The song that was called at that time was a song called 'Pumpkin Headland', which was also the song of a song that was funny about the tradition of the "Battle of Pochonbo", which is the most proud of Kim Il Sung's anti-Japanese struggle. ワハハハ困った倭人たち、肝三峰の戦闘で溶けちゃったね、キム・ジャングン君が率いる戦闘で怒られた倭人たち、ホンビョク山に逃げるあの姿を見ろよ、ダルグジ集めに動員された一人の民衆が尋ねた言葉、「あの、私、この袋の中に入っているものは何ですか」。 ‘보면 모르는가, 호박대가리야 호박대가리.' And the people who ate the hahaha ha ha ha, the melted in the battle of the liver sambae, the ones who are soul in the battle led by General Kim, look at the way they are running away, 見ればわかるか、カボチャの大地、カボチャの大地。 오 하하하 신나는 간삼봉 전투 승리, 우리 유격대에 왜놈들 쫄딱 녹았네  대충 이러한 노래말로 된 것이다. |||Gansambong||||guerrilla unit|||||||| 'Well, my lord, what is in this sack?' オハハハハ ワクワクするガンサンボン戦の勝利、我らの遊撃隊に倭寇がとろとろ溶けた、だいたいこのような歌の内容である。 우리는 그 노래를 너무나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Do not you see, pumpkin headlight pumpkin headlight.' 私たちはその歌をとても誇らしげに歌えるほど教育を受けました。 3학년 겨울. Oh ha ha, the exciting battle triumph won, and our guerrillas fizzled out 3年生の冬。 청년학생축전에 우리 하신인민학교와 동대문인민학교가 각 10명씩 뽑아 인민학교 대표로 공연하게 되였다. This song is roughly speaking. 青年学生祝典に私たちハシン人民学校と東大門人民学校がそれぞれ10人ずつ選ばれ、人民学校代表として公演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그 공연은 김일성을 모시는 공연이라 하여 온통 법석을 떨었다. We were educated enough to sing the song so proudly. その公演は金日成を祀る公演とあって、会場は騒然とした。 우리가 부르고 연주할 곡명은 ‘원수님이 주신 새 교복 정말 좋아요 ' 라는 노래로 교원대학 학생 손풍금 합주단 500명과 같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였다. Third grade winter. 私たちが歌って演奏する曲名は「元帥がくれた新しい制服が本当にいいです」という曲で、教員大学の学生手吹奏楽団500人と一緒に演奏しながら歌うことでした。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불렀다. At the Young Students' Festival, our People's School and the Dongdaemun People's School were selected for each of ten people to perform as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s School. 同じ歌を何十回、何百回と繰り返し歌いました。 련습은 약 두 달간 계속되였다. The performance was a performance by Kim Il Sung and made everyone shudder. 練習は約2ヶ月間続いた。 추운 겨울, 뻐스와 전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대동강 다리’를 걸어 건너서 교원대학으로 갔다. The song we would sing and play was to sing with the song "My new uniform was given to you by my enemy, 寒い冬、バスと路面電車を何度も乗り換えて「大同江橋」を歩いて渡り、教員大学に行きました。 련습이 끝나는 시간은 밤 12시나 1시쯤이였다. I sing the same song, sing it again, dozens of times, and even a few hundred times. 練習が終わるのは夜12時か1時頃だった。 혹독하게 추운 그 겨울 밤에 또다시 집으로 돌아갈 일이 끔찍스럽고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harshly|||||||||||| The training continued for about two months. 厳しい寒さのその冬の夜、またもや家に帰ることが恐ろしくて、遠く遠く感じられた。 어서 집으로 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집을 향해 떠나면 버스 정류소에서 발이 시려 발을 동동 구르는 날이 허다했다. so|||||||||||||||||frequent occurrence I exchanged cold winter, buses and trams several times and crossed 'Daedonggang Bridge' and went to Kyungwon University. 早く家に帰りたいという切実な思いで家に向かって出発すると、バス停で足がしびれて転がることが多々あった。 두 달간 매일 그 짓을 되풀이 하면 서도 그것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거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repeating||||||||| It was about 12 o'clock or 1 o'clock in the night. 2ヶ月間毎日その行為を繰り返しながらも、それがとても光栄なことだと思って当たり前のように受け止めていた。 어머니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 항상 가슴 아파하셨다. |||pitiful||| It was terrible and far away to return home again on that cold winter night. 母はそんな私が可哀想でいつも胸を痛めていた。 교원대학에서 련습이 끝나자 장소를 소년궁전과 대극장 무대로 옮겨 시연회를 가졌다. ||||||||demonstration| I was so eager to go home, and when I left for the house, I had a lot of days to get my feet rolling at the bus stop. 教員大学での練習が終わると、場所を少年宮殿と大劇場のステージに移して実演会を行った。 시연회 역시 20회 이상 진행했는데 이를 위해 보름 동안 참가자 전원이 학생려관에서 합숙했다. |||||||two weeks||||| I repeated it every day for two months, but it was a very glorious thing and I took it for granted. デモンストレーションも20回以上行い、そのために1ヶ月間、参加者全員が学生寮で合宿した。 이처럼 집중적인 훈련을 하고 나니 완전히 기계처럼 되였다. |||||||became My mother was so sick of me that I was always hurt. このような集中的なトレーニングをした後、完全に機械のようになった。 선잠이 든 상태라도 전주곡만 울리면 아무 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노래 할 정도였다. light sleep|||||||||||| When the training was finished at the teacher 's college, the place was moved to the boy' s palace and the theater stage and had a demonstration. 仮眠状態でも前奏曲さえ鳴れば、何の意識もなく機械的に動いて歌うほどだっ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The demonstration was also held more than 20 times, during which all the participants were camped in the student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