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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발췌문 (Literary Excerpts), 사랑을 믿다 -- 권여선 (2)

사랑을 믿다 -- 권여선 (2)

누가 보았다면 그때 나의 표정은 안주 반반을 이해하 기 위해 여종업원이 지었던 바로 그 복잡다단한 표정과 흡사했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가 이 년 전에 실연을 당했고 그보다 일 년 먼저 그녀가 실연을 당했다면 그녀는 삼 년 전에 실연을 당했다는 계산 이 나온다. 삼년 전이라면 우리는 스물아홉이었고,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은 만나고 있을 즈음이었 다. 그녀의 상대가 내가 아는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얼토당토않은 의혹이 솟구쳤 다. 그려나 이번에도 나는 고작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 그래?”

일 년 전 그녀는 어떻게 숨을 쉬었던가. 그녀에게도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던가. 물론 있었을 것 이다. 결코 희망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아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친구가 처연히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대관절 뭐가 남아 있다는 거야?” “글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별로 보잘것없는 것들이긴 하지.” “그러니 무슨 상관이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친구가 한 손으로 과장되게 허공을 그었다. “아니! 보잘것없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만 남아 있지!” 친구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그녀가 구원의 메시지를 주리라는 기대와 어 떤 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이 안주 반반처럼 섞여 있었다. “하짐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호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도 할 수 있지.”

친구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거야?” 친구는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상황의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든 애인이 다시 돌아 오게 만들 비법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곤란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테면 친척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일 들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친구의 눈빛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친척집? 경조사? 친구는 그녀가 자기를 진지하게 대하 지 않는다고, 심지어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상체를 뒤로 물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차라리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주든지.” 친구는 갑자기 국그릇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친구는 원래 눈물이 많았는데 연애를 하 면서 눈물이 더 늘었고, 애인과 결별한 후론 눈물이 거의 주량만큼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안동소주가 섞인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 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 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 주라고.”

그러나 친구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일 년 전, 몸이건 마음이건 어느 쪽으로도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겉으로는 살 맞은 짐승처럼 꿈틀댔지만, 그 안쪽에서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절망의 비커를 붙들고 쓰디쓴 고통의 한 방울도 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은 어떤 위로나 이해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가히 미친 균형이라 부를 만한 부동의 자세로 육체의 성마른 날뜀을 꼿꼿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을 견디자면 어쩔 수 없이 표독해지기 마련인데 그 표독함은 이를테면 맥주에 희석된 안동소주 처럼 너무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표독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기 앞에서 울고 있는 친구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이 고통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는 것을. 오래도록 기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고통이 사라진 뒤를 더욱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녀가 따라놓은 술을 마셨다. 싱거운 맥주 맛 속에 뾰족한 심처럼 독한 안동소주 향이 박 혀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이미 원경으로 물러났다. 이제 실연의 유대는 그녀와 나, 둘 사이에 맺어 졌다. 나는 떫은 혀끝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너는 그때 어떻게 극복, 아니, 수습? 너는 어떻게 했지?” 그녀는 국그릇 옆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경우는 운이 좋았지.”

그녀의 어머니는 탁월한 훼방꾼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결국 큰고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어머니 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조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금전적인 문제로 자신을 EJ났을지 모른다는 a아상이 그날 아침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 그녀가 무거운 선물 보따리를 들고 큰고모님 댁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전적인 문제로 실연을 당했단 말이야?”

나는 그녀가 실연을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실연의 상대가 혹시 내가 아 니었을까 하는 민망하고 얼토당토않은 의혹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 고 있었기에 그녀가 금전적인 문제 따위로 배신할 놈을 사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가, 하는 오라비 같은 회환이 밀려왔다. 그저 내 생각에, 라며 그는 빈 국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여전히 의심쩍 어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금전적인 문제는 아니었어. 하지만 워낙 몰리면 그런 생 각이 들기도 하잖아.”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현듯 내 여자가 나를 떠난 이유가 금전적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워낙 몰리고 있는 셈인가. 어이없게도 그랬다. 그녀가 내 컵을 잡으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그녀의 큰고모님 댁은 전철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시 외곽 끝자락에 있었다. 그녀가 방문하기 일 년 전쯤 그곳으로 이사했는데, 그녀는 큰고모님이 이사한 후로 한 번도 그 집을 방문해본 적이 없 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로는 전체가 사층 건물로, 삼층에는 큰고모님 부부만이 외롭게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식이 없으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이 대목에서 말을 흐렸다. 처음부터 큰고모님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었 다. 그녀의 고종사촌 오빠는 어려서도 아니고 젊어서 죽었다. 서른이 되기 직전이었고 제대 후 삼 년 반 넘게 준비한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다 가 난간이 없는 계단 옆으로 추락하는 어이없는 사고였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쳤고 하루가 지나서 야 머리가 피범벅이 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큰고모님 부부의 소유로 된 사층 건물이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인 그녀에게 상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그녀가 그댁을 자주 방문해 살가운 딸 노릇을 하며 미래의 소유물을 찬찬히 살펴두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열흘 동안 미주 관광을 다녀오는 길에 사온 선물을 꼭 큰고모님 댁에 전해달라고 며칠 동안 그녀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뭐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무척 무거웠거든. 설마 미국에서 끌 같은 걸 사오진 않 았을 텐데 꼭 꿀단지였던 것 같아.”

“꿀 비슷하다면 잼 아닐까?” “잼? 환갑 넘은 노인들에게 잼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노인들이 단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잼이라고 해두지 뭐.” 그녀는 무거운 잼 단지가 든 보따리와 대충의 약도만 가지고 큰고모님 댁을 찾아나섰다. 비록 변두 리라고는 해도 사층 건물이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 사람 이 무엇을 놓쳤는지 꼼꼼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기 소유물의 가치들을 하나하 나 점검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녀가 동전 한 푼을 챙기는 순간 그 사람은 동전 한 푼을 빼앗기는 식이었다. 그런 텅 빈 탐욕의 몸짓만이 다시는 만날 길 없는 그 사람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그녀가 그런 산수에 골몰했다는 게 나로서는 적잖이 흥미로웠다. 배울 수 있다면 가장 배 우고 싶은 산수였다.

그녀가 직접 가보니 안타깝게도 큰고모님 부부의 상가 건물은 사층이 아니라 삼층이었다. 모든 건 물이 그렇듯 옥상 위에 평소가 작은 성냥갑 모양의 옥탑방이 얹혀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것도 엄연히 한 층으로 계산에 넣은 것이었다. 사거리 근처의 상가 밀집 지역에 위치하긴 했지만 큰고모님 부부의 건물은 주변 건물에 비해 면적도 좁고 초라했다. 일층은 돼지갈비를 파는 식당이었고, 이층은 조그만 여행사 사무실이었다. 소위 사층이라는 조그만 옥탑방은 철학관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잼 단지가 든 보따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갔다. 큰고모님 부부가 살고 있다는 삼층의 현관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초인종 옆에 옥상 쪽 철학관을 표시하는 작고 빨간 플라스틱 딱 지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열려 있는 문을 그대로 당겼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주름진 회색 커튼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현관 입구에 커튼을 쳐놓은 집을 처음 보았다. 왼편에는 거울이 달 린 신발장이 놓여 있었다. 커튼과 거울이 놓은 좁다란 사각의 공간은 지하상가에 흔히 설치된 증명사 진을 찍는 무인 촬용소의 내부와 흡사해서, 그녀는 신발장 어딘가에 돈을 밀어 넣고 뭔가를 작동시켜 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집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려다 멈칫했다. 어디다 신발을 벗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적 동색 타일이 깔린 현관에는 이미 여러켤레의 신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큰고모부의 것으로 짐 작되는 남자 구두 한 켤레와 슬리퍼, 큰고모의 것으로 생각되는 여성용 단화, 고무신, 샌들 등이었 다. 일단 신발들만 봐서는 큰고모님 부부만 외롭게 사는 집이 아니라 대가족이 북적대는 집 같았다. 그녀는 현관 한귀퉁이에 신발을 벗어놓고 주름진 회색 커튼을 들추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회색 커튼을 젖히기 직전 그녀의 가슴속에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몰려왔다.

커튼을 젖히고 안쪽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그녀는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 쪽으 로 집중되는 걸 느꼈다. 선물 보따리를 끌어들이느라 커튼 안으로 상체만 들이민 상태에서도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 창 쪽으로 두꺼운 회색 커튼이 드리워 있어 한낮인데도 실 내는 밝지 않았다. 왼편 소파에 웅크린 세명의 여자가 노골적인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던 안주 반반이 나왔다. 상추를 곁들인다거나 브로콜리를 얹는 따위의 데커레이션이 완벽하 게 생략된, 둥근 접시에 검붉은 빛깔의 내용물만 반반씩 담겨 있었다.

“먹어봐. 한번 먹으면 잊기 힘든 맛이야.”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마루타가 된 기분으로 술을 한모금 마시고 제육과 오징어를 함 께 집어 입안에 넣었다. 무엇이라고 할까, 혀의 돌기들이 일제히 놀라 일어나며 환호하는 느낌이었 다. 재료나 양념도 훌륭했지만 프라이팬에 볶은 것을 다시 연탄불에 직화구이를 했는지 맵고 기름진 맛 끝에 고소한 탄불 맛이 느껴졌다. 술은 술대로 안주는 안주대로 한 겹 한 겹 얇고 정교하게 엇갈 리고 스며드는 독특한 맛의 조화였다.

“대단한데!”

나는 그녀를 만난 뒤 처음으로 내 느낌을 솔직히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밟아 껐다. 이 집에서는 그런 고전적인 담뱃불 끄기가 허용되나 보았다. 나는 돌연 유쾌해졌다.

“그래서? 그 여자들은 누구였는데?”

"가만, 가만. 나도 안주 좀 먹고.”

“그래, 그렇지. 어서 먹자. 먹고 얘기하자.”

내가 아니라 혀의 돌기들이 말했다.

그녀는 엉겁결에 세 명의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제일 안쪽에 앉은 여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 딱거렸다. 그녀는 선물 보따리를 벽에 세워놓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 요하게 산다던 큰고모님 부부 댁에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방문해 있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자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안쪽 여자는 족히 칠십은 훌 쩍 넘긴 노파였고, 눈가에 기미가 촘촘히 박힌 가운데 여자는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그녀 가까 이에 앉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여자만이 큰고모님과 비슷한 환갑 언저리인 듯 했다.

“이쪽으로 와 앉으셔.”

노파가 말했다. 그러나 노파의 손가락은 이쪽이라는 말과 달리 맞은편에 놓인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은 실내에서 가장 밝다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곳에 앉 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큰고모님은 지금 안 계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세 여자가 일제히 반응을 보였다. 큰고모님이라네, 라고 노파가 말하자, 그러게요, 라고 가운데 여자가 대꾸했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그녀 쪽으로 목을 쑥 빼며 물었다.

“큰고모님이라면, 여길 자주 들락거리는 편인가?” 들락거린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뇨, 자주는 못 오고, 한참 만에 왔습니다. 큰고모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러자 또 여자들이 활기를 띠었다. 어디 가셨을 리가 있냐느니, 문도 열려 있지 않았냐느니, 먼저 온 손님이 계시다느니, 우리도 기다리는 중이니 처녀도 거기 앉아 기다리라느니, 누가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말들이 그들 무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파가 재차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는 바람 에 그녀는 엉겁결에 그 자리에 뙤똑 앉았다. 모두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어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큰고모님이 여기로 옮겨오신 후론 처음 와 뵙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다시 여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만 하면 그런 식이었다. 기미 낀 여자가, 여 기로 옮겨오신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하자 노파가 그러게, 라고 대꾸했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다시 목을 쭉 빼며 물었다.

“처녀는 고모님이 여기로 언제 옮겨오셨는지 아나?” “한 일 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전엔 어디 계셨는데?” “서울 화곡동 쪽에 사셨습니다.”

“어머, 화곡동에 우리 큰형님이 사시는데 그때 함께 올걸.” 가운데 여자가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그래, 화곡동에 계실 적에도 자주 드나들었나?” 이번에는 노파가 그녀를 구슬리듯 물었다. “아뇨. 자주는 못 뵙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그녀는 살짝 횟수를 늘려 말했다.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날카롭게 추궁하듯 물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자주 아닌가?”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 노파가 큰고모님을 자주 방문하지 못한 그녀를 힐책하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가씨는 무슨 볼일로 왔어요?” 가운데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거, 초면에 그런 걸 물으면 실례 아닌가?” 노파의 말에 눈꼬리 사나운 환갑 여자가 큭큭 웃었다. 그녀는 좀 성가시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때 가운데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찔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려는 모습처 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뜨개질감을 손에 들고 뜨개질을 시작한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치마 위에 알록달록한 뜨개실과 바늘을 얹어두었나 본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로서는 그 번개 같은 뜨 개질 동작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는 마법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가운데 여자는 손을 빠르게 놀려 뜨개 질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요, 할머니. 이름 보고는 딱 남잔 줄 알았거든요.” 노파가 낮게 웅얼거렸다. “여자라니까, 여자.” “차라리 여자인 게 낫지요.”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말을 받았다. 그들은 그녀가 오기 전에 나누던 얘기라도 있었던지 이런 소리 들을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못 들은 척 했다. 지금이라 도 큰고모님이 나오기 전에 선물 보따리만 놓고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 가 고개를 들자 세 여자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대 한가운데 스포트라이트 를 받고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저는 이걸 큰고모님께 전해드리고 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여기 놓고 갈테니 말씀 좀 전해주시겠 어요?”

노파가 괘씸하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 여기까지 왔으면 뵙고 가야지."

사랑을 믿다 -- 권여선 (2) Believe in Love -- Yeosun Kwon (2)

누가 보았다면 그때 나의 표정은 안주 반반을 이해하 기 위해 여종업원이 지었던 바로 그 복잡다단한 표정과 흡사했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가 이 년 전에 실연을 당했고 그보다 일 년 먼저 그녀가 실연을 당했다면 그녀는 삼 년 전에 실연을 당했다는 계산 이 나온다. 삼년 전이라면 우리는 스물아홉이었고,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은 만나고 있을 즈음이었 다. 그녀의 상대가 내가 아는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얼토당토않은 의혹이 솟구쳤 다. 그려나 이번에도 나는 고작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 그래?”

일 년 전 그녀는 어떻게 숨을 쉬었던가. 그녀에게도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던가. 물론 있었을 것 이다. 결코 희망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아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친구가 처연히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대관절 뭐가 남아 있다는 거야?” “글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별로 보잘것없는 것들이긴 하지.” “그러니 무슨 상관이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친구가 한 손으로 과장되게 허공을 그었다. “아니! 보잘것없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만 남아 있지!” 친구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그녀가 구원의 메시지를 주리라는 기대와 어 떤 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이 안주 반반처럼 섞여 있었다. “하짐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호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도 할 수 있지.”

친구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거야?” 친구는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상황의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든 애인이 다시 돌아 오게 만들 비법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곤란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테면 친척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일 들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친구의 눈빛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친척집? 경조사? 친구는 그녀가 자기를 진지하게 대하 지 않는다고, 심지어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상체를 뒤로 물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차라리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주든지.” 친구는 갑자기 국그릇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친구는 원래 눈물이 많았는데 연애를 하 면서 눈물이 더 늘었고, 애인과 결별한 후론 눈물이 거의 주량만큼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안동소주가 섞인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 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 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 주라고.”

그러나 친구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일 년 전, 몸이건 마음이건 어느 쪽으로도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겉으로는 살 맞은 짐승처럼 꿈틀댔지만, 그 안쪽에서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절망의 비커를 붙들고 쓰디쓴 고통의 한 방울도 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은 어떤 위로나 이해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가히 미친 균형이라 부를 만한 부동의 자세로 육체의 성마른 날뜀을 꼿꼿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을 견디자면 어쩔 수 없이 표독해지기 마련인데 그 표독함은 이를테면 맥주에 희석된 안동소주 처럼 너무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표독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기 앞에서 울고 있는 친구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이 고통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는 것을. 오래도록 기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고통이 사라진 뒤를 더욱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녀가 따라놓은 술을 마셨다. 싱거운 맥주 맛 속에 뾰족한 심처럼 독한 안동소주 향이 박 혀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이미 원경으로 물러났다. 이제 실연의 유대는 그녀와 나, 둘 사이에 맺어 졌다. 나는 떫은 혀끝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너는 그때 어떻게 극복, 아니, 수습? 너는 어떻게 했지?” 그녀는 국그릇 옆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경우는 운이 좋았지.”

그녀의 어머니는 탁월한 훼방꾼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결국 큰고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어머니 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조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금전적인 문제로 자신을 EJ났을지 모른다는 a아상이 그날 아침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 그녀가 무거운 선물 보따리를 들고 큰고모님 댁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전적인 문제로 실연을 당했단 말이야?”

나는 그녀가 실연을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실연의 상대가 혹시 내가 아 니었을까 하는 민망하고 얼토당토않은 의혹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 고 있었기에 그녀가 금전적인 문제 따위로 배신할 놈을 사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가, 하는 오라비 같은 회환이 밀려왔다. 그저 내 생각에, 라며 그는 빈 국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여전히 의심쩍 어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금전적인 문제는 아니었어. 하지만 워낙 몰리면 그런 생 각이 들기도 하잖아.”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현듯 내 여자가 나를 떠난 이유가 금전적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워낙 몰리고 있는 셈인가. 어이없게도 그랬다. 그녀가 내 컵을 잡으며 말했다.

“천천히 마셔.”

그녀의 큰고모님 댁은 전철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시 외곽 끝자락에 있었다. 그녀가 방문하기 일 년 전쯤 그곳으로 이사했는데, 그녀는 큰고모님이 이사한 후로 한 번도 그 집을 방문해본 적이 없 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로는 전체가 사층 건물로, 삼층에는 큰고모님 부부만이 외롭게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식이 없으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이 대목에서 말을 흐렸다. 처음부터 큰고모님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었 다. 그녀의 고종사촌 오빠는 어려서도 아니고 젊어서 죽었다. 서른이 되기 직전이었고 제대 후 삼 년 반 넘게 준비한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다 가 난간이 없는 계단 옆으로 추락하는 어이없는 사고였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쳤고 하루가 지나서 야 머리가 피범벅이 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큰고모님 부부의 소유로 된 사층 건물이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인 그녀에게 상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그녀가 그댁을 자주 방문해 살가운 딸 노릇을 하며 미래의 소유물을 찬찬히 살펴두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열흘 동안 미주 관광을 다녀오는 길에 사온 선물을 꼭 큰고모님 댁에 전해달라고 며칠 동안 그녀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뭐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무척 무거웠거든. 설마 미국에서 끌 같은 걸 사오진 않 았을 텐데 꼭 꿀단지였던 것 같아.”

“꿀 비슷하다면 잼 아닐까?” “잼? 환갑 넘은 노인들에게 잼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노인들이 단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잼이라고 해두지 뭐.” 그녀는 무거운 잼 단지가 든 보따리와 대충의 약도만 가지고 큰고모님 댁을 찾아나섰다. 비록 변두 리라고는 해도 사층 건물이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 사람 이 무엇을 놓쳤는지 꼼꼼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기 소유물의 가치들을 하나하 나 점검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녀가 동전 한 푼을 챙기는 순간 그 사람은 동전 한 푼을 빼앗기는 식이었다. 그런 텅 빈 탐욕의 몸짓만이 다시는 만날 길 없는 그 사람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그녀가 그런 산수에 골몰했다는 게 나로서는 적잖이 흥미로웠다. 배울 수 있다면 가장 배 우고 싶은 산수였다.

그녀가 직접 가보니 안타깝게도 큰고모님 부부의 상가 건물은 사층이 아니라 삼층이었다. 모든 건 물이 그렇듯 옥상 위에 평소가 작은 성냥갑 모양의 옥탑방이 얹혀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것도 엄연히 한 층으로 계산에 넣은 것이었다. 사거리 근처의 상가 밀집 지역에 위치하긴 했지만 큰고모님 부부의 건물은 주변 건물에 비해 면적도 좁고 초라했다. 일층은 돼지갈비를 파는 식당이었고, 이층은 조그만 여행사 사무실이었다. 소위 사층이라는 조그만 옥탑방은 철학관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잼 단지가 든 보따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갔다. 큰고모님 부부가 살고 있다는 삼층의 현관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초인종 옆에 옥상 쪽 철학관을 표시하는 작고 빨간 플라스틱 딱 지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열려 있는 문을 그대로 당겼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주름진 회색 커튼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현관 입구에 커튼을 쳐놓은 집을 처음 보았다. 왼편에는 거울이 달 린 신발장이 놓여 있었다. 커튼과 거울이 놓은 좁다란 사각의 공간은 지하상가에 흔히 설치된 증명사 진을 찍는 무인 촬용소의 내부와 흡사해서, 그녀는 신발장 어딘가에 돈을 밀어 넣고 뭔가를 작동시켜 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집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으려다 멈칫했다. 어디다 신발을 벗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적 동색 타일이 깔린 현관에는 이미 여러켤레의 신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큰고모부의 것으로 짐 작되는 남자 구두 한 켤레와 슬리퍼, 큰고모의 것으로 생각되는 여성용 단화, 고무신, 샌들 등이었 다. 일단 신발들만 봐서는 큰고모님 부부만 외롭게 사는 집이 아니라 대가족이 북적대는 집 같았다. 그녀는 현관 한귀퉁이에 신발을 벗어놓고 주름진 회색 커튼을 들추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회색 커튼을 젖히기 직전 그녀의 가슴속에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몰려왔다.

커튼을 젖히고 안쪽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그녀는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 쪽으 로 집중되는 걸 느꼈다. 선물 보따리를 끌어들이느라 커튼 안으로 상체만 들이민 상태에서도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 창 쪽으로 두꺼운 회색 커튼이 드리워 있어 한낮인데도 실 내는 밝지 않았다. 왼편 소파에 웅크린 세명의 여자가 노골적인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던 안주 반반이 나왔다. 상추를 곁들인다거나 브로콜리를 얹는 따위의 데커레이션이 완벽하 게 생략된, 둥근 접시에 검붉은 빛깔의 내용물만 반반씩 담겨 있었다.

“먹어봐. 한번 먹으면 잊기 힘든 맛이야.”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마루타가 된 기분으로 술을 한모금 마시고 제육과 오징어를 함 께 집어 입안에 넣었다. 무엇이라고 할까, 혀의 돌기들이 일제히 놀라 일어나며 환호하는 느낌이었 다. 재료나 양념도 훌륭했지만 프라이팬에 볶은 것을 다시 연탄불에 직화구이를 했는지 맵고 기름진 맛 끝에 고소한 탄불 맛이 느껴졌다. 술은 술대로 안주는 안주대로 한 겹 한 겹 얇고 정교하게 엇갈 리고 스며드는 독특한 맛의 조화였다.

“대단한데!”

나는 그녀를 만난 뒤 처음으로 내 느낌을 솔직히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밟아 껐다. 이 집에서는 그런 고전적인 담뱃불 끄기가 허용되나 보았다. 나는 돌연 유쾌해졌다.

“그래서? 그 여자들은 누구였는데?”

"가만, 가만. 나도 안주 좀 먹고.”

“그래, 그렇지. 어서 먹자. 먹고 얘기하자.”

내가 아니라 혀의 돌기들이 말했다.

그녀는 엉겁결에 세 명의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제일 안쪽에 앉은 여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 딱거렸다. 그녀는 선물 보따리를 벽에 세워놓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 요하게 산다던 큰고모님 부부 댁에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방문해 있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자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안쪽 여자는 족히 칠십은 훌 쩍 넘긴 노파였고, 눈가에 기미가 촘촘히 박힌 가운데 여자는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그녀 가까 이에 앉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여자만이 큰고모님과 비슷한 환갑 언저리인 듯 했다.

“이쪽으로 와 앉으셔.”

노파가 말했다. 그러나 노파의 손가락은 이쪽이라는 말과 달리 맞은편에 놓인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은 실내에서 가장 밝다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곳에 앉 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큰고모님은 지금 안 계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세 여자가 일제히 반응을 보였다. 큰고모님이라네, 라고 노파가 말하자, 그러게요, 라고 가운데 여자가 대꾸했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그녀 쪽으로 목을 쑥 빼며 물었다.

“큰고모님이라면, 여길 자주 들락거리는 편인가?” 들락거린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뇨, 자주는 못 오고, 한참 만에 왔습니다. 큰고모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러자 또 여자들이 활기를 띠었다. 어디 가셨을 리가 있냐느니, 문도 열려 있지 않았냐느니, 먼저 온 손님이 계시다느니, 우리도 기다리는 중이니 처녀도 거기 앉아 기다리라느니, 누가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말들이 그들 무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파가 재차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는 바람 에 그녀는 엉겁결에 그 자리에 뙤똑 앉았다. 모두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어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큰고모님이 여기로 옮겨오신 후론 처음 와 뵙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다시 여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만 하면 그런 식이었다. 기미 낀 여자가, 여 기로 옮겨오신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하자 노파가 그러게, 라고 대꾸했고,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다시 목을 쭉 빼며 물었다.

“처녀는 고모님이 여기로 언제 옮겨오셨는지 아나?” “한 일 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전엔 어디 계셨는데?” “서울 화곡동 쪽에 사셨습니다.”

“어머, 화곡동에 우리 큰형님이 사시는데 그때 함께 올걸.” 가운데 여자가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그래, 화곡동에 계실 적에도 자주 드나들었나?” 이번에는 노파가 그녀를 구슬리듯 물었다. “아뇨. 자주는 못 뵙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그녀는 살짝 횟수를 늘려 말했다.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날카롭게 추궁하듯 물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자주 아닌가?”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 노파가 큰고모님을 자주 방문하지 못한 그녀를 힐책하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가씨는 무슨 볼일로 왔어요?” 가운데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거, 초면에 그런 걸 물으면 실례 아닌가?” 노파의 말에 눈꼬리 사나운 환갑 여자가 큭큭 웃었다. 그녀는 좀 성가시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때 가운데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찔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려는 모습처 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뜨개질감을 손에 들고 뜨개질을 시작한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치마 위에 알록달록한 뜨개실과 바늘을 얹어두었나 본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로서는 그 번개 같은 뜨 개질 동작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는 마법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가운데 여자는 손을 빠르게 놀려 뜨개 질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요, 할머니. 이름 보고는 딱 남잔 줄 알았거든요.” 노파가 낮게 웅얼거렸다. “여자라니까, 여자.” “차라리 여자인 게 낫지요.”

눈꼬리 사나운 여자가 말을 받았다. 그들은 그녀가 오기 전에 나누던 얘기라도 있었던지 이런 소리 들을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못 들은 척 했다. 지금이라 도 큰고모님이 나오기 전에 선물 보따리만 놓고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 가 고개를 들자 세 여자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대 한가운데 스포트라이트 를 받고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저는 이걸 큰고모님께 전해드리고 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여기 놓고 갈테니 말씀 좀 전해주시겠 어요?”

노파가 괘씸하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 여기까지 왔으면 뵙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