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3
게다가 미경은 고등학교 시절, 바오로를 향해 연정을 불태우던 그 수다한 여자애들 중에서 단연 발군이었고 결국 인생의 한 시기, 바오로와 연인으로 지내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까지도 그걸 영광으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여자애들은 그녀에 대한 루머를 퍼뜨렸고 소문 속에서 미경은 수십 번 애를 낳고 유기했다. 전교 일이등을 다투는데다 미모까지 출중한 여자애가 인기 제일의 남자애와 사귀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바오로와 나, 미경은 곧잘 함께 어울려 다녔다. 미경과는 바오로 얘기를 했고 바오로와는 미경이 얘기를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둘과 별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질투가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미경이라는 특정한 여성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런 관계에 대한 선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춘기에만 가능한 그 낯간지러운 진지함이 나는 부러웠다. 물론 미경은 예뻤다. 분명한 의지를 드러내는 콧날에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마치 네덜란드 산 도자기인형 같았다.
나는 그가 방황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소설을 읽던 그 시간들이 그로서는 꽤나 힘겨운 시간이었겠거니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졌다. 게다가 아직도 문학이 ‘방황하는 청춘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습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편지의 말미에 그는 어느 나라 민요에서 따온 구절이라며 이런 글을 덧붙였다.
“별은 빛나고 우리들의 사랑은 시든다. 죽음은 풍문과도 같은 것. 귓전에 들려올 때까지는 인생을 즐기자.”
아마 미경과 연애할 때에도 그 말을 써주었을 것이다. 생긴 건 럭비선수처럼 건장했지만 내면은 소심하기 짝이 없던 그는 소설과 시의 갈피갈피마다 밑줄을 긋고 그걸 노트에 베껴쓴 후, 지하철에서 남몰래 그 구절들을 외우는 버릇이 있었다. 회계법인에 들어간 후로도 한동안은 문학에 뜻을 두고 소설깨나 써왔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아마 내가 작가가 된 직후일 텐데, 문학에는 관심을 끊었다. 그들 부부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 그는 여전히 문학을 화제에 올렸지만 모두 오래 전에 나온 책, 이제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는 작가들이었다.
“그래도 네 건 읽어.”
그들의 살림집은 아담했다. 둘의 수입이 상당했으므로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강남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미경은 자기 프로그램을 맡았고 정식은 점점 더 바빠졌다. 연말이라도 되면 부부끼리도 밥 한 끼 같이 먹기 어려울 만큼 바빴다. 그때쯤부터는 나한테도 연락이 오질 않았으므로 나는 서서히 정식과 소원해졌고 당연히 친구의 아내와도 그렇게 되었다. 미경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프로그램 어디에서도 그녀의 냄새는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자주 듣던 노래라도 하나 틀어주었으면 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미경은 십대 아이돌 스타들이 진행하고 또 그런 애들이 출연하는 저녁시간대의 음악방송만 맡고 있었다. 내가 더이상은 들을 수 없는 그런 방송들을.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하긴, 고등학교 주일학교 친구를 서른이 넘어서까지 만난다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작가와 출판사 관계자들만 만나는 사람이 되어갔다.
무언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밸런타인 병이 쓰러져 쿨럭쿨럭 내용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병을 다시 세우고 휴지로 탁자를 닦았다. 바오로는 벌써 심하게 취해 있었다. 눈은 이미 풀렸고 자세도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폭탄주 때문일 것이다.
“나, 미경이하고 잤다.”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왜 그랬어?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럴 수밖에 없었어. 미경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 야, 씨팔, 그럼 어떻게 하냐. 불쌍한데.”
“그래, 알았어. 뭐가 그렇게 불쌍한데? 과부라도 된 거야?”
“넌 몰라도 돼. 아니, 몰라야 돼.”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노적가리 쓰러지듯 소파에 뻗어버렸다. 나는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될 거였구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구나. 그러려고 그렇게…… 나는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는 비척비척 침대에 가 몸을 뉘었다.
아침이 되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거실 탁자도 깨끗했다. 술잔과 술병은 모두 싱크대에 옮겨져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흔들어놓고 가버렸다. 아마 며칠은 소설에 손도 대지 못하리라. 그러다보면 마감도 지키지 못할 텐데. 나는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이번 계절에는 소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수화기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편집부에선 아직 며칠 시간을 더 줄 수 있는데 왜 이러냐며, 이번 호는 가뜩이나 소설이 없어서 난리인데 당신마저 그러면 안 된다며 붙잡았다. 마음 약한 나는 결국 그럼 다시 한번 써보겠다고 말했지만 속은 영 개운하지 않았다. 숙취, 지킬 가망 없는 약속, 혼자만 간직해야 하는 비밀. 모두 지긋지긋한 것들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속이 쓰렸지만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좋았다. 개천가에 만들어놓은 보도를 따라 걸었다.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사람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앞서 갔다. 힘이 좋은 시베리안 허스키 종의 개 한 마리가 주인을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개는 잠시 내 발치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더니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주인을 따라 앞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