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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6 - 장 그르니에 “섬” (Jean Grenier) - Part 2

Episode 6 - 장 그르니에 “섬” (Jean Grenier) - Part 2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이다. 그것은 멜빌이 "화요일"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 보여준 순례와 마찬가지이다.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우리가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책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과연 그르니에는 멜빌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그의 여행을 끝내고 있다. 힌두교도에 대한 말 끝에 그는 그 이름을 알 수도 없으며 어디에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항구,영원히 이르지 못하며 그 나름대로 사람의 발자취란 없는 어떤 다른 섬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여기서도 역시, 전통적인 종교들 밖에서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방식이 아마도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을 향한 유일한 인도방식이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었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후에는 다비워내는 신들이었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있을 경우에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어느 날 그 무례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르니에에게서 얻은 것은 확신들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확신을 줄 수도 주고자 원하지도 않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에게서 의혹을 얻었다. 그 의혹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나로 하여금 오늘날 흔히 쓰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 다시 말해서 근시안적 확신들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 힘이 되었다. "섬" 속을 뚫고 지나가는 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영혼의 의혹은 하여튼 나의 경탄을 자아냈고 나는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했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되풀이하여읽어 보노라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 주던 저 일종의 음악 같은 말들이다. 나는 새로운 땅에서 내가 수없이 끼고 돌던 높은 담장들에 둘러싸인 채 그 너머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동꽃 향기만을 건네주던, 가난한 나의 꿈이었던 저 은밀한 정원들 중 하나가 마침내 내게로 열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과연 비길 데 없이 풍성한 정원이 열리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나의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꿈틀거리면서 말을 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탄생은 어떤 단순한 독서, 어떤 짤막한 대화 한마디만으로도 한 젊은이에게서는 촉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펼쳐 놓은 책에서 한 개의 문장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고 한 개의 어휘가 아직도 방안에서 울리고 있다.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그와 동시에 벌써 그 완벽한 언어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수줍고 더욱 어색한 하나의 노래가 존재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푸득거린다.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쯤에는 나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것 같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그 책을 읽고 난 뒤였다. 다른 책들도 이 같은 결심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그 역할을 끝낸 다음에는 나는 그 책들을 잊어버렸다. 그와는 달리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경도하고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여러 해 여러 작품을 통하여 그 스승을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서는 더 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지적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어정쩡한 진리들 중에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저 흥분의 진리도 섞여 있다. 그 사회에서는 곧 우리들 자신 모두가 스승이요, 노예가 되어 서로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지니고 있다. 그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된다.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면 그 생명의 불이 꺼질 줄 모르며 서로서로의 생애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대화인 것이다. 이 오랫동안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 실제에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얻어 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은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스승은 흐뭇해 한다. 이와 같이 여러세대에서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도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르니에라면 이러한 어조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 어떤 백정의 병, 꽃의 향기, 지나가는 시간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여기서는 어떤 비길 데 없는 힘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정확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저 가벼운 언어는 음악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굳이 비교를 하려면 프랑스말로부터 새로운 액센트를 이끌어낸 바 있는 샤토브리앙과 바레스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 보아 무엇하랴! 그르니에의 독창성은 그런 비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우리들에게 단순하고 친숙한 경험들을 눈에 드러날 만큼 꾸미는 일이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 둔다. 단지 이런 조건에서만 예술은 남을 강요하지 않는 천부의 재능이다. 이 책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것을 얻은 나로서는 이 천부의 재능이 지닌 폭을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그 혜택을입고 있는지를 인정한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복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것을 알 수 있다.

‘지상의 양식'이 감동시킬 대중을 발견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이제는 새로운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아올 때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열어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아.. 대단하죠? 그, 이 참 추천사라는 건 이렇게 쓰는거구나 하는..것을 보여주는 알베르 카뮈의 명문장인데요. 특히 마지막 부분은 두고두고 인고에 회자되면서 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Episode 6 - 장 그르니에 “섬” (Jean Grenier) - Part 2 Episode 6 - Jean Grenier "Die Insel" (Jean Grenier) - Teil 2 Episode 6 - Jean Grenier "Island" - Part 2 Episode 6 - ジャン・グルニエ「島」 (Jean Grenier) - Part 2

그르니에가 그리고 있는 여행은 상상의 세계. The journey that Grenier is drawing is an imaginary world. グニエが描いている旅は想像の世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속으로의 여행, 섬에서 섬으로 찾아 떠나는 순례이다. It is a pilgrimage to the invisible world, a pilgrimage to the island. 目に見えない世界への旅、島から島への巡礼である。 그것은 멜빌이 "화요일"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 보여준 순례와 마찬가지이다. It's the same as Melville's pilgrimage in a different way in "Tuesday." それはメルヴィルが「火曜日」の中で別の方法で示した巡礼と同じである。 짐승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경이에 넘치다가 죽는다. The beast dies after enjoying, and the human dies after overflowing with wonder. 獣は楽しんで死ぬ、人間は驚嘆して死ぬ。

우리가 끝내 이르게 되는 항구는 어디일까? Where is the port where we end up? 私たちが最終的にたどり着く港はどこだろう? 바로 이것이 이 책 전편을 꿰뚫고 지나가는 질문이다. This is the question that passes through the entire book. それがこの本全編を貫く問いである。 이 질문은 사실 책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간접적인 해답을 얻을 뿐이다. This question actually only has one indirect answer in the book. この質問は、実は本の中で一つの間接的な答えしか得られない。

과연 그르니에는 멜빌과 마찬가지로 절대와 신성에 대한 명상으로 그의 여행을 끝내고 있다. Indeed, like Melville, Grenier ends his journey with a meditation on the absolute and the divine. 確かにグリュニエはメルヴィルと同様に、絶対と神への瞑想で彼の旅を終えている。 힌두교도에 대한 말 끝에 그는 그 이름을 알 수도 없으며 어디에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항구,영원히 이르지 못하며 그 나름대로 사람의 발자취란 없는 어떤 다른 섬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After talking about the Hindus, he tells us the story of some other island that doesn't know its name or knows where it is, any port that never lasts, and has its own footsteps. ヒンドゥー教徒の話の終わりに、彼はその名前もわからず、どこにあるのかもわからない、永遠にたどり着くことのできない、人の足跡のない別の島の物語を私たちに語ってくれる。 여기서도 역시, 전통적인 종교들 밖에서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방식이 아마도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을 향한 유일한 인도방식이 되었던 것 같다. Here too, for a young man who grew up outside of traditional religions, this cautious and implicit approach probably seemed to be the only way of guiding to a deeper reflection. ここでもやはり、伝統的な宗教の外で育った一人の若者にとって、この慎重で示唆に富んだアプローチは、おそらく、より深い内省への唯一の道しるべとなったのだろう。 개인적으로 볼 때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Personally, I wasn't without God. 個人的に見て、私に神がい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The sun, night, and sea ... were my gods. 太陽と夜と海...は私の神々でした。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었다. But it was the gods of pleasure. しかし、それは享楽の神々であった。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후에는 다비워내는 신들이었다. They were gods who, having filled themselves to the brim, would empty themselves. 彼らは、いっぱいに満たした後は、それを空っぽにしてしまう神々だったのです。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있을 경우에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If I were to be with them alone, I would become absorbed in the pleasure itself and forget them. 彼らとだけ一緒にいる場合、私は享楽そのものに夢中になり、彼らを忘れてしまうのである。 내가 어느 날 그 무례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Someone needed to remind me of mystery, sanctity, human finiteness, and impossible love in order for me to be able to abandon that rude heart one day and return to my bosom of this natural god. 私がある日、その無礼な心を捨てて、私のこの自然の神の懐に戻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ためには、誰かが私に神秘と神聖さ、人間の有限性、そして不可能な愛について思い出させてくれる必要がありました。 그러므로 내가 그르니에에게서 얻은 것은 확신들이 아니었다. Therefore, it wasn't the convictions I got from Grenier. したがって、私がグリュニエから得たのは確信ではなかった。 그는 나에게 확신을 줄 수도 주고자 원하지도 않았다. He didn't want to give or convince me. 彼は私に確証を与えることも、与えたいとも思わなかった。 그와 반대로 나는 그에게서 의혹을 얻었다. On the contrary, I got suspicion from him. それどころか、私は彼から疑念を抱きました。 그 의혹은 끝이 없을 것이다. The suspicion will never end. その疑念は尽きないだろう。 그것은 예를 들어, 나로 하여금 오늘날 흔히 쓰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 다시 말해서 근시안적 확신들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 힘이 되었다. It has, for example, helped me to avoid being a blind man because of the humanist in the sense that I use today, that is, myopic convictions. それは、例えば、私にとって、今日よく使われる意味でのヒューマニスト、つまり近視眼的な確信に盲目になってしまわないように守ってくれる力になった。 "섬" 속을 뚫고 지나가는 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영혼의 의혹은 하여튼 나의 경탄을 자아냈고 나는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했다. Anyway, the suspicion of the soul swaying from side to side passing through the "island" aroused my admiration, and I wanted to imitate it. "島"の中を突き抜けるあちらこちらに揺れる魂の疑念は、とにかく私の驚嘆を呼び起こし、私はそれを真似したくなった。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었다. "I've had a lot of fantasies about arriving in an unfamiliar city alone, with nothing. "一人で、何も持たずに、見知らぬ街に、到着する空想を私は何度もしたことがある。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So I wanted to live humbly, or not, roughly. そして私は謙虚に、いや、謙虚に生きてみたかった。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But most of all, if I do that, I will be able to keep secrets. " しかし、何よりもそうなれば、私は秘密を大切に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되풀이하여읽어 보노라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 주던 저 일종의 음악 같은 말들이다. These are the kinds of music that made me like a drunk person if I read it over and over again in the evening of Algiers. これこそが、私がアルジェの夜を歩きながら繰り返し読み返すと、まるで酔っ払いのように私を酔わせてくれる、ある種の音楽のような言葉である。 나는 새로운 땅에서 내가 수없이 끼고 돌던 높은 담장들에 둘러싸인 채 그 너머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동꽃 향기만을 건네주던, 가난한 나의 꿈이었던 저 은밀한 정원들 중 하나가 마침내 내게로 열려오는 것만 같았다. I seemed like one of those secret gardens, my poor dreams, finally opened up to me, surrounded by the tall fences that I wore in my new land and handed only the invisible fairy scent of flowers beyond. 私は新天地で何度も何度も行き来した高い塀に囲まれ、その向こうに目に見えない夾竹桃の香りだけを届けてくれた、貧しい私の夢であったあの秘密の庭の一つが、ついに私に開かれるような気がした。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I wasn't wrong. 私の考えは間違っていなかった。 과연 비길 데 없이 풍성한 정원이 열리고 있었다. さすがに他に類を見ないほど豊かな庭園が開かれていました。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나의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꿈틀거리면서 말을 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Something, someone was eagerly wriggling in me, wanting to speak. その何かが、その誰かが私の中でぼんやりと蠢きながら何かを言いたがっていた。 이 새로운 탄생은 어떤 단순한 독서, 어떤 짤막한 대화 한마디만으로도 한 젊은이에게서는 촉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This new birth can be triggered by a young man with just a simple reading or a brief conversation. この新たな誕生は、ある単純な読書、ある短い会話の一言で、一人の若者から引き起こされるのである。 펼쳐 놓은 책에서 한 개의 문장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고 한 개의 어휘가 아직도 방안에서 울리고 있다. In the open book, one sentence stands out and one vocabulary still rings in the room. 広げられた本の中で、一つの文章がひときわ目立って見え、一つの語彙がまだ部屋の中で鳴り響いている。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에워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ふと、適切な言葉、的確な指摘に包まれ、矛盾が解きほぐされて秩序が見つかり、無秩序が止まってしまう。 그와 동시에 벌써 그 완벽한 언어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수줍고 더욱 어색한 하나의 노래가 존재의 어둠 속에서 날개를 푸득거린다. それと同時に、すでにその完璧な言語に答えでもするかのように、恥ずかしげに、さらに厄介な一つの歌が存在の闇の中で羽ばたく。

내가 "섬"을 발견하던 무렵쯤에는 나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것 같다. By the time I discovered "Island", I think I also wanted to write. 私が"島"を発見した頃には、私も文章を書きたいと思っていたような気がする。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결심이 된 것은 그 책을 읽고 난 뒤였다. However, it was only after reading the book that the vague idea truly became my decision. しかし、その漠然とした考えが本当に私の決意となったのは、その本を読んでからだった。 다른 책들도 이 같은 결심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그 역할을 끝낸 다음에는 나는 그 책들을 잊어버렸다. It is true that other books helped make this decision, but once I finished the role, I forgot them. 他の本もこのような決意に役立ったのは事実だが、一度その役割を終えた後は、私はそれらの本を忘れてしまった。 그와는 달리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In contrast, this book was constantly alive inside me and for over twenty years I have been reading it. それとは対照的に、この本は常に私の中に生きていて、二十年以上も私はこの本を読み続けている。 오늘에 와서도 나는 "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이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Even today, I often write and speak words in "islands" or in other books of the same author, as if they were my own. 今日に至っても、私は「島」の中に、あるいは同じ著者の他の本の中にある言葉を、あたかも自分のものであるかのように書いて話すことがしばしばある。 나는 그런 일을 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I don't think it's perfect. 私はそんなことを可哀想だとは思わない。 다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온 이 같은 행운을  기뻐할 뿐이다. ただ、私は自分自身に訪れたこの幸運を喜ぶだけです。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경도하고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여러 해 여러 작품을 통하여 그 스승을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서는 더 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It was a very good luck to myself that I felt the need to admire my mind at the right time and get a teacher at the right time than anyone else, and thus to respect the teacher through many works for many years. 誰よりも適切なタイミングで自分の心を磨き、師匠を得、そして長年、様々な作品を通してその師匠を尊敬する必要性を感じていた私自身にとっては、これ以上ない幸運であった。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At least once in a lifetime, being able to experience the enthusiasm of that enthusiasm for enthusiasm is not good luck, but not good luck. 少なくとも一生に一度は、あの熱狂的な服従の心を体験できるのは、まさに幸運といえるだろう。 우리들의 지적 사회가 자랑하여 마지않는 어정쩡한 진리들 중에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저 흥분의 진리도 섞여 있다. Among the insane truths that our intellectual society is proud of and endlessly mixed with, the truth of that excitement that wants the death of others. われわれの知的社会が自慢して 마지못해 마지못해言う曖昧な真理の中には、それぞれが他人の死を望むあの興奮の真理も混じっている。 그 사회에서는 곧 우리들 자신 모두가 스승이요, 노예가 되어 서로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その社会では、やがて私たち自身が師匠であり、奴隷となり、お互いに殺し合いをしているようなものになってしまう。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지니고 있다. However, the word teacher has a different meaning. しかし、師匠という言葉には別の意味もある。 그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된다. Because of that meaning, the Master and the Disciple face each other only in a relationship of respect and gratitude. その意味から、師と弟子はただ尊敬と感謝の関係の中で向き合うことになる。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면 그 생명의 불이 꺼질 줄 모르며 서로서로의 생애를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대화인 것이다. この場合、問題となるのは意識の闘争ではなく、一度始めたらその生命の火が消えることなく、お互いの生涯を満たすことができる会話なのである。 이 오랫동안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This long-standing exchange does not require subjugation or obedience, but it causes imitation in the most spiritual sense. この長期にわたる交流は、従属や服従を要求するものではなく、ただ最も精神的な意味での模倣を生じさせる。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 실제에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얻어 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은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스승은 흐뭇해 한다. At the end, when the disciple leaves the Master and completes his own world, in practice, the disciple always knows that he could never repay anything, having the nostalgia for the time when he had only got everything. Even though the teacher is happy. 最後に弟子が師匠を離れ、彼の独創的な世界を完成させるとき、実際において弟子はいつも自分がすべてを手に入れることしかできなかった時代への郷愁を抱きながら、自分は何にも報い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師匠はほくそ笑む。 이와 같이 여러세대에서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도 건설되는 것이다. In this way, in many generations, the mind gives birth to the mind, and fortunately, human history is built on the basis of praise as much as hate. このように、何世代にもわたって精神が精神を生むものであり、人間の歴史は幸いなことに憎しみだけでなく讃美の土台の上に築かれるのである。

그러나 그르니에라면 이러한 어조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 어떤 백정의 병, 꽃의 향기, 지나가는 시간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Rather, he prefers the story of the death of a cat, the bottle of a butcher, the scent of flowers, and the passing time.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この本の中で本当に言い尽くしたことは何もない。 모두가 여기서는 어떤 비길 데 없는 힘과 섬세함으로 암시되어 있다. 정확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저 가벼운 언어는 음악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The precise yet dreamy light language has the flexibility of music.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The language flows quickly, but the echo leaves a long afterglow. 굳이 비교를 하려면 프랑스말로부터 새로운 액센트를 이끌어낸 바 있는 샤토브리앙과 바레스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If you want to make a comparison, you should compare it with Chateaubriand and Barres, who have drawn new accents from French. 하지만 비교해 보아 무엇하랴! 그르니에의 독창성은 그런 비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Grenier's originality does not require such a comparison. 그는 다만 우리들에게 단순하고 친숙한 경험들을 눈에 드러날 만큼 꾸미는 일이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He just speaks simple and familiar experiences to us in a language that is not as decorative. 彼はただ、私たちにとってシンプルで身近な経験を、目立たないほど飾り気のない言葉で語る。 그리고 나서 그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 둔다. そして、彼は私たち自身に、自分たちの好きなように解釈することを任せる。 단지 이런 조건에서만 예술은 남을 강요하지 않는 천부의 재능이다. Only under these conditions, art is a natural talent that does not force others. ただ、このような条件下でのみ、芸術は他人に押し付けない天賦の才である。 이 책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것을 얻은 나로서는 이 천부의 재능이 지닌 폭을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그 혜택을입고 있는지를 인정한다. As a person who has gained so much from this book, I am well aware of the breadth of this natural talent and I admit how much I am benefiting from it.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The great revelation a person gets while living his life is so rare that it can be at most once or twice.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But that revelation, like luck, changes the way you live. しかし、その啓示は幸運のように人生の様相を変える。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복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것을 알 수 있다. For those who are blessed with a passion to live and a passion to know, it can be seen that this book will provide a similar revelation for every page you turn. 生きようとする情熱、知ろうとする情熱に恵まれた人々にとって、この本は一ページ一ページをめくるたびに、同様の啓示を提供することがわかる。

‘지상의 양식'이 감동시킬 대중을 발견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It took twenty years for the 'food on the ground' to discover the masses to impress. 地上の養殖」が感動する大衆を発見するのに二十年かかった。 이제는 새로운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아올 때가 되었다. 今こそ、新たな読者がこの本を求めてくる時である。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I still want to be one of those readers. 私は今もその読者の一人でありたい。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After opening this little book on the street, I would like to go back to the evening when I ended up going back to my room to read without hesitation, finally going to a place where no one was there, after folding it back and holding it on my chest after reading the first few lines. 路上でこの小さな本を開いた後、やっと最初の数行を読んだだけで、再び折りたたんで胸に抱きしめ、ついに誰もいないところに行き、必死に読むために自分の部屋まで一足飛びで走ったあの晩に私は戻りたい。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I envy without any repentance. 私は何の恨みもなく羨ましい。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열어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I envy that unfamiliar young man who will open this "island" for the first time today. 今日初めてこの"島"を開くことになったあの見知らぬ若者を熱い気持ちで羨ましく思う。 아.. 대단하죠? Ah ... is it great? あ・・・すごいですね。 그, 이 참 추천사라는 건 이렇게 쓰는거구나 하는..것을 보여주는 알베르 카뮈의 명문장인데요. Well, this really recommender is the name of Albert Katya, who shows that it's written like this. その、この推薦状というのはこういうふうに書くものなんだな...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のが、アルベール・カミュの名文章です。 특히 마지막 부분은 두고두고 인고에 회자되면서 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In particular, the last part was left, and as I was talked to ingo, I heard so many people's hearts. 特に最後の部分は、後世に語り継がれ、本当に多くの人の心を揺さぶり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