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여덟 번째-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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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열 여덟 번째
대남공작원으로 소환되여 1년간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 기본 훈련을 마치고 김일성 생일을 맞아 2박 3일간 첫 휴가를 받아 집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대뜸,
“너 전에 학교 다닐 때 어떤 아주머니와 담화한 적이 있니?”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이러이러하게 생긴 아주머니라며 그 녀자의 인상을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떠올라 ‘아, 그아주머니' 하며 그때의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그 뒤의 일을 나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네가 중앙당에 소환되고 한 달도 채 안됐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집으로 찾아 왔잖겠니. 너를 찾길래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오진우 부인이라더라.”
오진우는 당시 인민무력부장으로 실권력이 대단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그렇게 높으신 간부 집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느냐며 하여튼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고 들어오라 했지.”
어머니는 거의 일 년이 가까워 오는 일인데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어머니에게는 큰일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부인께서 이런 델 다 찾아 왔느냐고 물으니, 그 부인이 학교로 너를 찾아 갔더란다. 담임 선생도 너가 학교엘 나오지 않는다며 집을 모른다기에 너의 학급 애들에게 물어서 찾아왔다더라. 학교에 가서 구실 붙일게 없어 네가 책을 빌려가서 찾으러 왔다고 둘러댔다더라. 그러면서 그 부인은 너를 한번 만나 보았는데 괜찮더라면서 자기 넷째 아들 장가 보내려는데 마땅한 녀자가 없다고 하는거야. 며느리감 찾고 있는데 네 사진을 한 장 달라지 않겠냐. 그래서 중앙당에 소환되어 갔는데 이제 집에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부인은 언제 그랬냐며 놀라더라. 그래도 자꾸 사진 한 장을 달라고 졸라서, 아마 단념해야 할 것 같다고..이제 부모들인 우리들도 어쩔수 없게 되었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은 아주 많이 서운해 하며 돌아갔다.' 어머니는 그 부인이 서운해 하며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부인만큼이나 서운한 모양이였다.
“나도 좀 서운하더라.”
어머니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 기본훈련을 받고 조국통일에 대한 사명감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으로 흘렸다.
“조금만 늦게 당에 소환되였어도 평범한 녀자로 살 뻔 했잖아.”
나는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시 한 번 성인이 된 것을 실감케 하는 일이였으며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때 내가 한 달만 늦게 중앙당에 소환되였으면 어쩌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의 넷째 며느리가 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내가 오진우의 며느리감 물망에 올랐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단지 하나의 추억이 되였을 뿐이다.
내 나이 만 18세. 대학교 2학년 2월 중순쯤이였다. 학교에서 첫 시간 일본어 강론을 마치고 휴식하는 시간에 동무들과 잡담을 하고 있는데 학부 지도원이 교실 문에 고개만 디밀고 나를 불렀다. 학부 지도원의 뒤를 따라 1학부장 실로 갔더니 그곳에는 이미 일본어과 1년 선배 언니와 후배 한 사람이 와서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50대의 남자가 우리의 일거일동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였다. 그의 가슴에는 깃발 초상 휘장이 달려 있었다. 중앙당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