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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두 번째-2

나의 어린시절, 두 번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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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두 번째

내 인생의 시작은 남달리 화려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역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 인생이 어디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본관이 경주 김씨라고 아버지는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함남 풍산이라는 산골 어느 빈농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래서 지금도 큰아버지와 삼촌들이 북청과 신포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버지 김원석은 6.25 때 인민군 전사로 낙동강 전투에도 참전했었다 한다. 휴전이 되자,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한 후 김일성 종합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반 때 중매로 어머니 림명식을 만나 결혼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반 당시 아버지는 중매 서는 분을 따라 외가집에 갔다가 외할아버지를 보고 그분의 인품에 반했다. 또한 어머니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그 늘씬한 체격과 녀성다운 용모에 반해 ‘저 녀자와 결혼해야 겠다' 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친가 쪽은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워낙 바빠 친가쪽과는 자주 왕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가는 어머니가 자주 왕래하여 항상 소식이 오갔고 외가와 얽힌 추억담도 적지 않다.

우리 외가는 개성에 있다. 외할아버지인 림증호는 1메타 75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술, 담배를 안 하시고 가정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였다. 외할아버지는 개성 토박이로 학교 다닐 때는 신문에 날 정도로 서예를 잘했다 한다. 수완이 좋아 사업을 잘 했고 돈도 많이 벌었고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엿들어 보면 아주 잘 살던 집안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절대로 우리 앞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주' 라면 조선에서는 무조건, 사상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혹시나 우리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가 많이 튀어나온 사람에게 ‘지주배때기' 라고 욕을 할 정도로 지주를 싫어하는 실정이다. 우리 외가집은 아마도 대단한 개성 갑부였던 모양이였다.

가끔 외갓집에 가보면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그릇을 사용하고 집은 전통적인 조선식 기와집인데 아주 크고 좋았다. 조선에서는 이렇게 큰 집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판자본가나 모리간상배라 하여 성분이 안 좋은 집으로 취급당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개성 미인으로 70 후반에 뵈였을 때도 피부가 곱고 훤할 정도였다. 음식 솜씨가 좋고 인정이 아주 많은 분이셨다.

어머니는 안동 림씨로 이름을 남자처럼 명식으로 짓게 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독자로 태어나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아들 낳기를 무척 고대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첫 임신을 하자 명식이라는 남자 이름을 미리 지어놓았다 한다.

“아들 이름을 미리 지어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데....”

할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딸을 낳았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좀 섭섭해 하는 마음도 잠시뿐 어머니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개성에서 녀학교를 졸업하고 만월 중학교 력사 교원을 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양 대동강 구역 동신동 단층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였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서 꾸바 주재 북조선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꾸바로 갔다. 나는 꾸바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웠다. 꾸바에서의 생활은 행복했고 나의 인생의 시작은 조선에 사는 일반 자녀들보다 화려하고 특별났다. 그러나 꾸바에 있을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내가 조국에 돌아와서야 다른 친구들 보다 행복한 생활을 누렸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두 번째-2 Meine Kindheit, Zweite - 2 My Childhood, Second - 2 Mi infancia, segundo - 2 私の子供時代、第二弾-2 Мое детство, второе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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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두 번째 My childhood, the second

내 인생의 시작은 남달리 화려했다고 생각한다. I think that the beginning of my life was gorgeous. 私の人生の始まりは異常に華やかだったと思う。

어린 시절 역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In childhood, too, there was nothing to be troubled. 幼少期は、やはり南国的なものだった。 내 인생이 어디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I began to think about where my life began to deviate.

나의 본관이 경주 김씨라고 아버지는 가르쳐 주었다. |family origin||||| ||慶州|慶州金氏だと||| My father taught me that my main building is Gyeongju Kim. 私の本貫は慶州金氏だと父は教えてくれました。 아버지는 함남 풍산이라는 산골 어느 빈농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mountain village||poor farmer||||second son| His father was born as the second son of three sons and three daughters in a farming village called Pungsan, Hamnam. 父は咸南の豊山という山奥の貧しい農家に3男3女の次男として生まれた。 그래서 지금도 큰아버지와 삼촌들이 북청과 신포에 흩어져 살고 있다. So even now my father and my uncles are scattered in Bukchung and Shinpo. そのため、今でも大父や叔父たちが北城と新浦に散らばって暮らしている。 아버지 김원석은 6.25 때 인민군 전사로 낙동강 전투에도 참전했었다 한다. His father, Kim Won Suk, was a warrior of the People's Army in the year of 6.25, and he als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the Nakdong River. 父キム・ウォンソクは6.25の時、人民軍の戦士として洛東江の戦いにも参加したという。 휴전이 되자,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한 후 김일성 종합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After the ceasefire, his father was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and attended Kim Il Sung University's English department. 休戦後、父は軍から除隊し、金日成総合大学英文科に進学した。

그리고 대학 졸업반 때 중매로 어머니 림명식을 만나 결혼했다. ||||arranged marriage|||| She met her mother Rim Myung-sik and married when she was in college. そして大学卒業時にお見合いで母親のリム・ミョンシクと出会い、結婚した。 김일성종합대학 졸업반 당시 아버지는 중매 서는 분을 따라 외가집에 갔다가 외할아버지를 보고 그분의 인품에 반했다. |||||||||||||character dignity| At the graduating class of Kim Il Sung University, his father went to his mother's house with a matchmaker and saw his maternal grandfather and fell in love with his personality. 金日成総合大学の卒業生の時、父は仲人の方を追いかけて実家に行き、母方の祖父を見てその人柄に魅了された。 또한 어머니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그 늘씬한 체격과 녀성다운 용모에 반해 ‘저 녀자와 결혼해야 겠다' 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appearance|||||||||| She also decided to `` marry her '' when she met her mother for the first time. また、母親と初めて対面した瞬間、そのほっそりとした体格と女性らしい容姿に魅了され、「あの人と結婚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決意したという。 나는 친가 쪽은 잘 알지 못한다. |paternal relatives|||| I don't know the parents very well. 私は実家の方はよく知りません。 아버지가 워낙 바빠 친가쪽과는 자주 왕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t was because his father was so busy that he did not come and go often with his parents. 그러나 외가는 어머니가 자주 왕래하여 항상 소식이 오갔고 외가와 얽힌 추억담도 적지 않다. |maternal relatives|||visiting back and forth|||||||| However, the mother often visits the family, so news always comes and goes, and there are many memories related to the mother-in-law. しかし、母が頻繁に出入りするため、常に連絡があり、母との思い出話も少なくない。

우리 외가는 개성에 있다. Our maternal ancestry lies in individuality. 私たちの実家は個性的である。 외할아버지인 림증호는 1메타 75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술, 담배를 안 하시고 가정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였다. |||||tall person||||||| His mother-in-law, Lim Jeung-ho, was over 1 meta 75 and tall. He did not drink, smoke, and was active and active. 외할아버지는 개성 토박이로 학교 다닐 때는 신문에 날 정도로 서예를 잘했다 한다. |||||||||calligraphy|| My maternal grandfather is a native of Kaesong, and when he went to school, he was good at calligraphy. 母方の祖父は個性派で、学校時代は新聞に載るほど書道が得意だったという。 수완이 좋아 사업을 잘 했고 돈도 많이 벌었고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엿들어 보면 아주 잘 살던 집안인 것 같았다. resourcefulness|||||||||||||||||| 手腕が||||||||||||||||裕福な家庭|| He was resourceful, so he did a good job and made a lot of money, and when I listened to the conversations between the adults, it seemed that they were from a very prosperous family. 機転が利き、商売がうまくいってお金もたくさん稼いでいて、大人同士の会話を聞いていると、とても裕福な家庭のようでした。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절대로 우리 앞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Nevertheless, my mother never told us that. それでも母は決して私たちの前でそんな話をすることはなかった。 ‘지주' 라면 조선에서는 무조건, 사상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혹시나 우리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landlord|||||||||||||||||| If 'Jiju' is regarded as an unconditional person in Joseon unconditionally, I did not say it intentionally because we might feel burden. 地主」というと、朝鮮では無条件に、思想が良くない人とみなされるので、もしかしたら私たちが負担を感じるかもしれないので、あえて言わなかったようです。 배가 많이 튀어나온 사람에게 ‘지주배때기' 라고 욕을 할 정도로 지주를 싫어하는 실정이다. |||||||||stomach bulge|| ||||地主腹||||||| A lot of people are protruding from the propriety hate landlords to swear to say 'holding time'. お腹がたくさん出ている人を「地主桶」と罵るほど、地主が嫌われているのが現状です。 우리 외가집은 아마도 대단한 개성 갑부였던 모양이였다. |||||大富豪だった| Our mother-in-law was probably a wealthy individual with great personality. 私たちの実家は、おそらくすごい個性派だったようだ。

가끔 외갓집에 가보면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그릇을 사용하고 집은 전통적인 조선식 기와집인데 아주 크고 좋았다. Occasionally, when you go to the house, you can use high-quality bowls, which are rare in Joseon. たまに一軒家に行くと、朝鮮ではなかなか見られない高級な器を使っていて、家は伝統的な朝鮮式瓦の家ですが、とても大きくて良かったです。 조선에서는 이렇게 큰 집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In Joseon, people don't like houses this big. 朝鮮ではこんな大きな家もあまり好まれません。 매판자본가나 모리간상배라 하여 성분이 안 좋은 집으로 취급당하기 때문이다. |Morrigan's patron||||||| 買弁資本家|森の商人||||||| This is because they are treated as bad sellers or bad house owners. 売国奴や守銭奴と呼ばれ、成分が悪い家として扱われるからだ。

외할머니는 개성 미인으로 70 후반에 뵈였을 때도 피부가 곱고 훤할 정도였다. ||||||||fair and bright| My grandmother was a personality beauty, and when she was in the late 70's, she had fine skin. 母方の祖母は個性的な美人で、70代後半に会ったときも肌がきれいで透き通るほどだった。 음식 솜씨가 좋고 인정이 아주 많은 분이셨다. The food was good and the people were very acclaimed. 料理の腕も良く、人望も厚い方でした。

어머니는 안동 림씨로 이름을 남자처럼 명식으로 짓게 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名式で|||||| It's a good reason for her mother to be named Andong Lim as a man. 母親は安東林氏という男らしい名字を名乗るようになったのにはそれなりの事情がある。 외할아버지가 독자로 태어나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아들 낳기를 무척 고대했다. |reader|||||||| |||||||息子を産むこと|| I was very looking forward to having a son because my maternal grandfather was born as a reader and grew up lonely. 母方の祖父が独身で生まれ、孤独に育ったため、息子の誕生をとても楽しみにしていた。 그래서 외할머니가 첫 임신을 하자 명식이라는 남자 이름을 미리 지어놓았다 한다. |||||明植という||||名付けておいた| So, it is said that when my maternal grandmother became pregnant for the first time, the male name Myeong-sik was made up in advance. そのため、母方の祖母が初めて妊娠したとき、ミョンシクという男の子の名前をあらかじめつけておいたという。

“아들 이름을 미리 지어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데....” “It is said that if you name your son in advance, you will have a son...” "息子の名前をあらかじめつけておくと息子が生まれるそうです...."

할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딸을 낳았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Contrary to her grandmother's expectations, she gave birth to a daughter, but it is said that the name was given as a male name. 祖母の期待に反して娘を産んだが、名前はそのまま男の子の名前をつけたという。 좀 섭섭해 하는 마음도 잠시뿐 어머니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There was only a moment of resentment, but my mother grew up monopolizing the cuteness of the family. 少し残念な気持ちも束の間、母は家の中の可愛らしさを独り占めして育った。 개성에서 녀학교를 졸업하고 만월 중학교 력사 교원을 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한다. |||満月|||教師を||||| After graduating from girls' school in Kaesong, she was married to Manwol Middle School history teacher. 開城で女学校を卒業し、満月中学校の歴史教師をしているときに父と出会い、結婚したという。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양 대동강 구역 동신동 단층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with||||||||| The father and mother began their honeymoon in a single-story house in Dongsin-dong, Daedong River, Pyongyang. 父と母は平壌大同江区東新洞の単層住宅で新婚生活を始めた。 그렇게 해서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였다. So I was born between the two of them. そうして私は二人の間に生まれることになった。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서 꾸바 주재 북조선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꾸바로 갔다. |||||stationed|North Korea|||third secretary|||to Cuba| Shortly after he was born, he went to Cuba with his father, who was appointed as the third secretary of the North Korean embassy in Cuba. 生まれて間もなく、クバ駐北朝鮮大使館の3等書記官に就任した父を追ってクバに行った。 나는 꾸바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웠다. |in Cuba|walking||| I learned to walk and learn to speak in Cuba. 꾸바에서의 생활은 행복했고 나의 인생의 시작은 조선에 사는 일반 자녀들보다 화려하고 특별났다. Life in Cuba was happy, and the beginning of my life was more splendid and special than ordinary children living in Joseon. 그러나 꾸바에 있을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But when I was in Cuba, I didn't feel it. しかし、クバにいたときはそれを感じなかった。 내가 조국에 돌아와서야 다른 친구들 보다 행복한 생활을 누렸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It was only when I returned to my homeland that I realized that I had enjoyed a happier life than other friends. 私が祖国に帰ってきて初めて、他の友達より幸せな生活を送っていたことに気づくことができまし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Confessions of Kim Hyun-hee, Dae Nam Gongwon, by Park Soo-hyun in Lang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