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 「때로는 나에게 쉼표」 중에서
쿠바의 산티아고Santiago, Cuba에 머물던 일주일 동안 나는 마르꼴과 매일 인사를 나눴다. 그는 늘 정오쯤이면 내가 묵는 건물 아래층 식당 테라스에 앉아 닭고기와 감자를 먹었는데, 점심을 먹는다기보다는 맥주를 마시러 온다고 말하는 게 맞았다. 내가 인사를 건네면 정오부터 발그레해진 마르꼴은 매일 같이 내게 손 키스를 날렸다. 그는 점심부터 맥주를 마시기 시작해 날이 저물어야 겨우 자리를 떴는데, 그의 앞에 앉아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달랐다. 하루는 옆 건물 빵집 주인, 하루는 그 식당의 웨이터, 하루는 거리의 악사, 하루는 어쩌다 그 앞에 앉아 있게 됐는지 모를 정도의 절세미인. 나도 산티아고에 온 첫날 그와 맥주를 마셨다. 마르꼴은 시시껄렁한 얘기를 할 뿐이었다. 뭐 누가 꼭 필요한 것도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그의 콧수염이 쉴 새 없이 달싹이길 원하는 듯했고 하루에 두세 번쯤 호탕하게 웃고 싶은 듯했다. 그런 마르꼴은 늘 그 식당 앞을 스쳐지나가는 내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
바쁜 일도 없이 늘 그 자리에서 술만 먹는 마르꼴이 대체 몇 시인지 왜 묻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늘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사실 기억력이 안 좋은 마르꼴은 벌써 내 나이도 다섯 번이나 물었다. 식당 웨이터에게 그의 직업을 물었더니, 시계 수리공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시계를 고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수리점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시계가 없어 매일 나에게 시간을 물어보는 그가 시계 수리공이라니. 그런데 떠나오기 며칠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마르꼴의 시계 수리점이 바로 그 식당이라는 것. 그러니까 마르꼴은 내 시계가 잘 가고 있는지 늘 확인하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 여행자에게 있어 멈춘 시계는 가장 큰 골칫거리다. 내 시계가 맞지 않았다면 마르꼴은 날 불러 앉혀 돈을 좀 벌기도 했겠지.
지금 몇 시야?
그와 헤어지던 저녁, 그는 또 내 시계를 확인했다.
아프리카의 도곤족은 말했다. 당신은 시계가 있지만 나에겐 시간이 있소! (부분 생략)
작가_ 정영 -- 시인, 작사가. 1975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지은 책으로 시집 『평일의 고해』, 에세이집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 등이 있으며 뮤지컬「남한산성」,드라마 「선덕여왕」등 다수 주제곡 작사.
낭독_ 유성주 -- 배우. 연극 '그게 아닌데', '싸움꾼들' 등에 출연. 문형주 -- 배우. 연극 '꿈속의 꿈', '민영이야기' 등에 출연. * 배달하며
여행의 매력은 충동이 용서받는 거라고 어느 글에선가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다 보면 충동 정도는 여행의 여러 동기 중에 아주 보잘 거 없는 게 되어버리지 뭡니까. 하긴 이 정도 공간 이동을 해버리면 출발지에서의 감정 정도는 이미 사라져버렸을 테죠. 가는 곳마다 매번 생생한 삶이 적나라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녀는 눈물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여행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여행서가 넘쳐나다 못해 발에 마구 차이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영혼을 분명하게 앞세우고 몸이 뒤따르는 여행은 참 드뭅니다. 문득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 고 했던 박용래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거 하나 깨닫기 위해 먼 곳을 다녀오는 지도 모르죠. 지름길을 피해 멀리 도는 거. 하긴 그게 진짜 여행이니까요. 문학집배원 한창훈
출전_ 『지구 반대편 당신』(달) 음악_ signature collection - lite&easy mix2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webzine.munjan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