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 김영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 Part 2
그 산동대학에 초청을 받아서 갔는데, 저하고 누가 갔냐하면 (중국작가죠) 비페이위(Bi Feiyu)라는 작가인데, 한국에는 “청의”라는 그리고 아마도 “의미”라는 소설이 나와있을거예요.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청의”라는 소설의 작가인 비페이위하고 또 몇 명의 다른 작가들하고 산동대학에 갔는데 그 전에는 홍콩에 있었습니다. 홍콩 친예대학이라는 곳에 일종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가있었는데요, 홍콩 대학과 산동대학이 어떤 그런 문화교환 프로그램 같은 걸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홍콩 대학 관계자하고 같이 신동대학에 일종의 초청을 받아서 가게된거예요. 근데 가기전에 ‘어떤 부분을 낭독을 할 것이냐'를 작가들한테 미리 물었어요. 작가들이 얘기를 해줬는데 왜냐하면 산동대학의 사람들은 한국말을 모르잖아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제가 한국말로 읽는 것은 좀 어렵겠고, 학생들 중에서, 그 국제학부 학생들 중에서 중국어로 읽고 (만다린이죠) 중국어로 읽고, 영어로 읽고 싶다. 영어판이 있거든요. ( “파괴할 권리”는) 영어로 읽고 싶다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도 한국어로 읽겠다. 그러면 삼 개 국어로 읽게 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여러가지를 조정해야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읽을 것인지는 작가하고 조율을 해야만 학생들이 미리 준비를 해서 연습을 해야할 것 아니겠어요. 그 학생들도 이제 중국말로 영어로. 제가 읽으려고 하는 부분들을 미리 연습을 하게 됩니다. 그러더니 출발하기 한 열흘 전 즈음에 (열흘 전인가요 보름 전인가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겠고, 그 중에서는 이 부분을 읽겠다고 제가 얘기를 했던 거예요. 원래 제가 낭독을 하면 이 소설을 읽을 때 해외에서 라든가 뭐 낭독을 할 때는 아주 가장 앞부분을 낭독을 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앞부분을 읽는게 가장 편합니다. 그 왜그러냐하면 앞부분이야말로 독자들에게 처음 말을 거는 부분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앞부분이 가장 흡입력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흡입력이 없다 하더라고 그 부분 부터 읽어야 사실은 그 뒤도 궁금하고 또 서서히 끌려들어가는 그런 맛이 있거든요. 뒤에가면 강렬한 부분이 있지만 잘못 읽으면 생뚱맞아요. 잘못 읽으면, 막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을 읽어주는데 도데체 왜 저러는지 ...생뚱맞은거죠. 아주 잘 알려진 텍스트라면 상관이 없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책은 그래서 작가들은 앞부분을 읽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제가 앞부분을 읽는데 일단 그 앞부분을 한번, 늘 낭독하는 부분이니까요. 이 부분을 한번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그 그림을 모사해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의 표정이다. 내가 그린 마라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마라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의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선은 크게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 팔에 들려진 편지로 시선이 옮겨지거나 아니면 욕조 밖으로 비어져나와 늘어진 다른 팔을 따라간다. 죽은 마라는 편지와 펜, 이 두 사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거짓 편지를 핑계로 접급한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마라는 답장을 쓰려다 살해되었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다비드는 멋지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
마라를 죽인 샬롯 코데이라는 여자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롱드 당의 청년 당원이었던 샬롯 코데이는 자코뱅의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거짓 편지를 미끼로 접근, 목욕중인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1973년 7월 13일의 일이었고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사건 직후 체포된 확신범 코데이는 나흘 만인 7월 17일 목이 잘렸다.
자코뱅 당의 거두였던 마라가 죽은 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다비드는 자코뱅의 미학을 알고 있었다. 공포라는 연료 없이 혁명은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뒤집힌다. 공포를 위해 혁명이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공포를 창출하는 자는 초연해야 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화집을 덮고 일어나 목욕을 했다. 작업을 하는 날이면 반드시 몸을 청결히 해야한다. 목욕을 끝내고 면도를 산뜻하게 하고 난 다음에 나는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의뢰인을 찾고 자료를 검색한다. 이일은 길고 지루하지만 참아내야 한다. 한 달이 걸릴 수고, 때론 반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의뢰인만 찾아낸다면 반 년 정도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므로 나는 검색 기간에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 도서관에는 주로 역사책이나 여행 안내서를 읽는다. 일을 끝내고 돈을 받으면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 안내책자들은 복잡한 사실들을 간단학 명쾌하게 축약해 놓는다 한 도시에는 수십만 개의 인생이 있고 수 백년의 역사가 있고, 인생과 역사가 교직하면서 만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여행안내책자들은 단 몇 줄로 줄여버린다.
이를테면 파리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파리는 세속적인 곳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정치적, 예술적 자유의 성지이고, 그 자유를 알리는 외침이거나 그것에 대한 숨은 바람이다. 파리는 관용의 정신으로 로베스피에스, 퀴리, 와일드, 사르트르, 피카소, 호치민, 조이스, 그리고 호메이니와 같은 사상가, 예술가, 혁명가, 그리고 많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해주었다. 파리는 19세기의 뛰어난 도시계획의 훌륭한 산물이지만 파리의 음악과 예술, 극장이 그러한 것처럼 건축물도 중세풍에서부터 아방가르드적인 것, 아니 아방가르드를 넘어서는 것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역사롸 새로움, 문화와 문연 그 자체의 자기 인식인 파리가 이세상에 존재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창조해냈을 것이다.”
파리에 대해서 더이상의 말은 필요없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여행안내서 읽기를 즐긴다. 그것은 역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 장, ‘마라의 죽음' 부분입니다. 시작하는 부분인데요. 이 부분 뭐, 제가 아까도 말쓴 드렸다시피 정말 저의 집에 틀어박혀 갖고, 방에 틀어박혀서, 그때 이제 백수였으니까, 집안의 눈치를 약간 의식을 하면서, 또 젊을 때, 그때가 제가 스물 일곱, 아마 그 즈음 됐을 텐데요. 끓어오를 때죠. 지금도 제가 읽다보니까 그 당시 어떤 사고의 격렬함. 근데 이제 좀 이금 보면 약간, 내가 과연 저런 사람이었나 싶을 때도 있는데, 하튼 격렬함 이런 것들이(약간 좀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그런게 느껴지는 텍스트죠. 하여간 저 부분을 읽는데 저 부분은 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즐겨 읽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뒤로가면 좀 지뢰밭입니다. 야한 부분도 많고요. 공개적인 자리에서 읽기는 좀 쑥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제가 저 앞부분, 1장의 앞부분을 읽고, 어떨 때는 1 장을 전부다 읽을 때도 있어요. 원고지, 200 자 원고지로 한 40 매 정도 되는 그런 분량인데. 그걸 그냥 다 읽을 때도 있어요. 하여튼 그것은 이제 자살 안내인이 자기 삶의 철학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던 부분들은 저게 이제 제 인생의 철학이거나 저의 예술관으로 생각하셔서, ‘어 김영하가 뭐 그랬다는데?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은 뻔뻔하다 뭐 이렇게 말했다는데?' 그것은 제 예술관이 아니고, 약간 좀 이상한 사람이죠. 저 주인공, 약간 과대망상,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발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제 블로그에서도 얘기를 했었는데, 트위터에서 얘기를 했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소설이라는 것은 인물들의 발언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장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