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열 일곱 번째-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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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열 일곱 번째
휴가를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불쑥 밤늦게 내가 나타나자 가족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더구나 언제나 동행하던 지도원도 없이 혼자 나타난 나를 보고 식구들은 ‘웬일인가'고 물었다. 다른 식구들은 아랑곳 않고 대뜸 아버지에게
“내가 휴가 나왔을 때 어쩌면 그렇게 쌀쌀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울면서 따졌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몹시 심각해지더니
“이제 너와는 정을 떼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서 그랬다. 네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아무것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비장해 보였었다. 나는 그 당시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벌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응어리졌던 섭섭함이 꿈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꿈을 꾸고 나니 아버지의 예측이 맞았다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가 말할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젠 다 틀린 일이겠지. 이승에서는 가망이 없으니 저승에서나 만나 뵐 수 있을는지......' 잡념에 빠져 앞으로 닥칠 간난(艱難)을 걱정하다가 종이 울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종이 울리자 내 시중을 들어주던 중년 아주머니마냥 뚱뚱하고 무뚝뚝한 29살의 로처녀 경찰관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조사실 바닥에 양탄자를 깔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른 뒤 서남쪽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한다. 이들은 오후 5시만 되면 전국적으로 울리는 종소리에 따라 회교도 경배의식을 가진다. ‘시라딸살자'라는 페르시아 양탄자를 깔고 머리에 터번을 쓰고 평소에는 신지 않는 양말을 신은 뒤 경건한 모습으로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란다. 종교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나는 이들의 행동이 해괴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무엇이 저들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상을 향해 절을 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절을 할 뿐 아니라 경배 시간만 되면 이들의 표정은 누가 감히 말을 걸 수도 없을 만큼 경건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보이지도 않는 그 무엇에 절을 하는 그들보다는 살아 있는 위대한 령도자를 높이 받들어 모시는 북조선이 훨씬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북조선에서는 학교 공부와 선전 영화를 통해 ‘종교는 가장 반동적이고 악질적인 미신'이라고 가르친다. 종교인은 모두 위선자이고 잔인하다는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종교니 신앙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증오심이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과연 북조선 인민들이 김일성 동상이나 김정일 초상화 앞에 섰을 때 저토록 신심에서 우러나서 경건해지고 행복해지는가 하는 문제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야 말을 시작할 때부터 집중적으로 학습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받들어 모시지만 판단력과 분별력이 생길 나이가 되면 단지 남의 시선이 두려워 열성을 다하는 척하는 현상이 많았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그 후과가 두렵기 때문이다.
경배의식을 마친 로처녀 경찰관은 양탄자를 걷고 터번을 벗어 놓은 뒤에 나에게 다가와 친동생을 부르듯 이름을 부르며 다정하게 굴었다.
“마유미, 너는 피부가 흰 것을 보면 분명히 일본 여자임에 틀림없어. 너는 정말 아름다워.”
그녀는 내 팔 곁에 자신의 검은 팔뚝을 걷어 나란히 대조하며 웃었다. 그야말로 아무런 사심없는 천진난만한 행동이었다. 이처럼 이들은 나에게 인간적으로 잘 대해 주었지만 내가 115명을 살해한 살인마라는 사실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나는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빴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