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일곱 번째-168
[...]
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일곱 번째
조선말로 내 이름과 가족사항을 말하고 나니 눈물이 쏟아졌다. 이 신세가 되려고 8년간이나 그 산골 초대소에 숨어 살면서 온갖 간난신고를 다 참아왔던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는가. 나는 허탈감에 빠져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내 작은 몸둥이가 너무너무 처참했다.
“그래 잘했어. 진정하고 저녁이나 먹자.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고.”
수사관은 질문을 중단하고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잡담을 걸어왔다. 조선말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저녁식사가 들어오고 여수사관이 따라 들어왔다.
“어머, 얘가 한국말하네." 여수사관은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다 말고 멈추어 섰다. 나는 그동안 조선말을 못 알아듣는 척 능청을 떨며 연극하던 일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언니. 미안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과를 했다.
“미안하기는 얘, 진작 한국말을 했어야 하잖아. 괜찮아.”
여수사관은 내 손을 다독거리며 부끄러워하는 나를 달래주었다. 조선말을 시작하고 나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리는 것처럼 속이 후련했으나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였다. 내가 혹시 이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남아 있었다. 결국은 그들과 나와의 승부는 나의 패배로 끝났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 숱한 날들의 승부놀이가 허망하게 끝나 버린 지금 패배자의 비굴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죽든 살든 당당한 마음이 되고 싶었다. 죄 지은 사실에 대해서 당당하게 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승부에 졌지만 그들과 나는 처음부터 경쟁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그쪽이 우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끈기와 지혜와 인간적인 사랑이 나를 굴복시킨 것이다. 남조선 특무들의 우월성에 나는 한마디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심문이 시작되었다.
“오늘 밤을 새우더라도 전체적인 이야기는 끝내는 게 어때? 할 수 있지?” 수사관은 그것을 전제로 나와 마주 앉았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 나는 쾌히 접수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모두 다 털어놓고 싶었다. 만일 이야기하다가 중단한 채 하룻밤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이 변할 것 같아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수사관들의 가장 큰 관심은 오로지 KAL 기 폭파사건 그 자체였다.
“네가 폭파한 것이 사실이지?”
누구나 첫 질문부터 이 말을 하고 싶겠지만 수사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뜸 사건에 대해 묻지 않고 살아온 나의 과정부터 이야기를 유도해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그 방법은 효과적인 것 같았다. 인간과 인간과의 신뢰감을 쌓은 뒤에 사건에 대한 것을 캘 눈치였다. 그래야만 추호의 거짓말도 없이 낱낱이 사건 전모를 밝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조선 특무들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인가 보다.
“나는 북에서 온 사람들과 많이 만나 조사를 해온 사람이야. 조사에 앞서 꼭 한 가지 약속을 하자. 그건 아무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더라도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거야. 만일 대답하기 곤란하면 그냥 말하기 어렵다든가 또는 후에 말하겠다고 해도 좋아. 나도 그런 부분은 묻지 않을 테니까...단 거짓말이나 꾸며 만든 내용만은 말하지 않도록 해. 이제는 한 번 더 거짓말을 해서 너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영원히 신뢰를 회복하기 힘드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수사관은 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당부하는 듯한 충고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