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열 다섯 번째-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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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열 다섯 번째
그들은 내가 조선 영화를 봤어야 당연하다는 식으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물어오니까 못 봤다고 말하기가 곤란해졌다. 왜냐햐면 수사관들이 정말 흑룡강성에서 조선영화를 상영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못 보았다고 대답한다면 결국 내가 흑룡강성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탄로나는 게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실지로 살았다는 것과 살지 않았다는 것이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북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흑룡강성에 대해 연구를 할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생각나는 영화 중에 중국에서 상영했을 만한 영화를 골라 알려주었다.
“1980년도 경에 오상시에 있는 영화관에서 조선족 동무와 같이 ‘꽃파는 처녀', ‘금희와 은희의 운명' 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 따른 질문을 계속했다.
“그 영화관 이름이 뭐였지? 어디에 있는 영화관이야? 그 영화 줄거리가 어땠어? 주인공이 누구였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한 사실에 대해 꼬치꼬치 캐고 묻는 심문 방법을 쓰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본 지 오래 되었고 영화에서 나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줄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눈물을 흘리는 장면만 기억이 됩니다.”
나는 얼버무리고 머리가 많이 아파서 쉬고 싶다고 요구했다. 허락을 받고 나는 침대에 누워 버렸다. 바레인에서의 심문 방법과 다르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위압적인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심문 내용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엉뚱해서 미리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조사를 받다나면 얼마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이 탄로 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떤 대책을 미리 세우기조차도 두려웠다. 내가 겨우 대책을 세워 거기에 관한 말을 시작하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질문이 쏟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다나면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각본에 없던 말을 많이 하는 동안 그들에게 새로운 미끼만 던져주는 꼴이 되었다. 앞으로는 이들이 취하는 작전을 보아 가면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나갈 생각이었다.
점심식사로는 회덮밥이 나왔다. 날 생선을 잘게 썰어 얹은 밥을 물고추장에 비벼 먹으라고 한다. 날생선도 여러 가지 종류가 듬뿍 얹혀 있었다. 북에서는 보기 드문 귀한 날 생선이었다. 이제는 먹는 것으로 나를 꾀려 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그들의 속마음을 읽었다.
북에서는 날 생선을 회 쳐 먹는 것은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나 있는 일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다. 나도 사회에 있을 때는 생선회를 본 적이 없었으나 중앙당에 소환되고 나서야 먹어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바다 생선이 아닌 민물고기였다. 잉어회였는데 높은 간부를 모시고 하는 동석식사 때만 그것이 상 위에 등장했다. 북의 날생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날생선 맛에 나는 회유인 줄 알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여자 수사관에게 중국에서는 싱싱한 회를 보기도 어렵다고 능청을 떨었다. 더구나 고추장을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그냥 덥석 붓고 비벼먹고 싶었으나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처음 보는 양 해야 했다.
“이건 뭐죠? 케찹인가요?”
여자수사관이 머리를 흔들며,
“이건 고추장이라는 건데 몹시 매운 거예요.” 하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나는 조금 찍어 먹는 시늉을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여수사관은 그런 내 꼴이 우스운지 연방 젓가락에 고추장을 찍어 나에게 권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