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세 번째-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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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열 세 번째
큰 아버지댁이라고 알려 준 집 앞마당에 중학교 2.3학년쯤 되여 보이는 녀자 아이들이 망차기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영옥이네 집이 어디가? 영옥이를 아니?" 놀이에 열중해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그랬더니 그중 큰 아이가,
“내요, 어째 그러오?”
하며 심한 함경도 사투리로 대답한다. 그리고는 나와 현수를 번갈아 말끔히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적어 준 집 주소와 략도를 그에게 넘겨 주면서, 우리가 평양 작은 아버지 집에서 온 현희하고 현수라고 하자 그애는 부끄러운 듯이 몸을 꼬며 “옵소” 하였다. 말 한마디로 반가움을 표시하더니 곧장 집으로 뛰여 들어갔다. 놀던 아이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다른 이방인을 보듯 우리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조금 뒤에 사진으로만 보아 온 큰 엄마가 영옥이 손에 이끌려 헐레벌떡 나오면서,
“무시기? 현희 현수가 왔다고? 련락도 없이 갑자기 어떻게 왔소. 기차다.... 집을 용케 잘도 찾았소..”
라며 나와 현수의 손을 잡고 안으로 잡아 끌었다.
큰댁은 방 2칸에 부엌 하나 있는 시골 주택이였다. 집안에 들어서자 명태 비린 냄새가 더 코를 찔렀다. 마당, 나무가지, 지붕 할 것 없이 온통 집안 전체에 명태를 널어 말리고 있었다. 옷에 명태가 닿을 것 같아 무의식 중에 몸이 움츠러 들었다.
방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며칠 전 전보를 쳤다 말하고 역까지 마중 나오지 않은 리유를 먼저 물었다.
“무시기? 전보를 쳤다고? 우린 전혀 못 받았는데....대체 무슨 일이오?”
큰어머니는 전보를 받지 못한 게 마치 자기 탓인 양 미안해했다. 다음 날 평양에 계시는 부모님께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보를 치러 체신소에 갔다가 그곳에 우리가 평양에서 친 전보가 아직 배달이 안 된 채 그대로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미 사람은 도착해 있는데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보는 그 뒤에 배달되는 일이 보통이였다.
큰아버지네 식구는 아들 넷에 딸 하나였다. 사촌 오빠 2명은 군대 나가 집에 없었고 영옥이 밑으로 남동생 둘만 집에 있었다. 이들은 나와 사촌간이라 해도 그때가 첫 대면이였다. 북조선에서는 려행을 철처히 통제하기 때문에 우리뿐 아니라 북조선 주민 거의가 가까운 친척끼리 얼굴 한 번 못 보는 례가 많았다. 큰아버지는 평양에 몇 번 다녀간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큰아버지가 돌아오자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집 식구의 안부와 큰댁 식구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밥상에는 김장김치와 동태 식혜, 명란이 찬으로 올라 왔다.
김치는 젓갈 대신 동태를 넣어 담갔는데 그 량도 풍족히 넣었기 때문에 맛이 좋았다. 명란도 생태에서 바로 뽑아낸 것이여서 알이 꼬들꼬들하고, 특히 동태 식혜는 살이 많은 동태를 그대로 익혀서 별미였다. 그러나 밥은 깔깔해서 입 안에서만 뱅뱅 돌고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간유 냄새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간유는 동태의 애를 졸여서 만든다.
평양에서는 일정치는 않으나 그래도 이따금 콩기름이나 옥수수기름 같은 식용유를 배급하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식용유 배급이라곤 없어 각자 집에서 간유를 만들어 식용유로 먹는다. 그런데 그 간유 냄새가 보통 역한게 아니다. 습관이 안된 현수와 나는 비위가 틀려 코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