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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4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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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

하루는 내가 애를 업고 밖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아래층 아주머니가 부르더니 참외 하나를 깎아 주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과일이라서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참외를 한 입 깨물었다. 그런데 그 맛이 어찌나 쓴지 얼른 뱉으려 했으나 준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삼켰다.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간신히 절반 정도를 먹고 더 이상 먹기가 힘들어 밖에서 먹겠다며 남은 반쪽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아빠트 뒤쪽으로 돌아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가 살핀 뒤 남은 참외 반쪽을 땅에 묻고 발로 밟아 흔적을 없앴다. 그날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뒤 나는 쓴 참외를 왜 먹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참외만 보면 질겁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가 먹었던 참외는 설익은 것 이였다.

우리는 꾸바에서 간식으로 빵을 먹던 습관이 들어 조국에 돌아와서도 집에 빵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놓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바깥 심부름을 다닌 곳이 아빠트 뒤편에 있는 밥공장이였다. 밀가루와 쌀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가서 수수료 30전을 내면 떡이나 빵으로 바꾸어 주었다. 나이가 나보다 위인 옆집 녀자아이의 안내를 받아 밥공장에 가서 줄을 섰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의 끝에 서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린 끝에 겨우 내 차례가 되여 접수구에 빵과 바꿀 밀가루를 담은 소랭이를 내밀었더니 접수구 아주머니가, “떡은 있는데 빵은 지금 다 떨어졌으니 낙케 오라.”하고 말했다. 나는 떡만 바꾸어 손에 들고 ‘낙케'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한 채 벙벙해 있는데 옆집 아이가, “나중에 오라는 뜻이야.” 하며 ‘낙케' 가 ‘나중에'라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꾸바에서 생활하면서 개성 출신인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도 불편함이 많았다.

동무들로부터 내 말씨가 황해도 말씨 같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또 일본어를 공부하면서는 일본말을 배우더니 어떻게 우리말을 일본말처럼 간사하게 하느냐고 말을 많이 들었다. 조국에 돌아와서 시작하는 생활과 환경은 모든 것이 다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고생스러웠다. 다시 꾸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다. 오히려 꾸바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집 꾸미기도 끝나고 꾸바에서 부친 짐도 모두 찾아와 겨우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 무릎에 이상이 왔다. 조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 검역소에서 검역원이 우려하던 관절염 증세가 나타난 것이였다. 증세는 갑자기 악화 돼 걷기조차 어려웠다.

“지난 번 검역원이 말할 때 무릎에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건데....”

어머니는 검역원이 하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심히 흘려버린 일을 몹시 후회했다. 꾸바는 열대지대이기 때문에 랭풍기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 랭풍기가 있는 방에 오래 있어서 관절염에 이상이 왔다는 것이였다. 주사도 맞고 약도 쓰며 어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관절염은 치료가 되였다.

꾸바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나자 아버지도 귀국하였고 우리 집은 오르내리기 편한 3층으로 이사해 내려왔다. 나는 이곳에서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선발될 때까지 살았다. 인민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 그 집에서 다녔기 때문에 가장 정이 든 곳이다.

이 아빠트는 그 시기에 건축한 옛날식 아빠트로 10여 가구당 하나씩의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리용하게 되여 있었다. 더구나 연탄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게 되여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여름철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겨울철이 되면 수시로 수도관이 얼어 붙어 물 긷기가 어려워 생활이 참 힘들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4 Meine Kindheit, Vierte - 4 My Childhood, Fourth - 4 Mi infancia, Cuarto - 4 私の子供時代、第4回-4 Мое детство, четвертое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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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린시절, 네 번째 * My childhood, fourth

하루는 내가 애를 업고 밖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아래층 아주머니가 부르더니 참외 하나를 깎아 주었다. |||||wandering around|||||||| One day, I was hanging out outside with my child, and the woman downstairs called me and cut me off a melon. ある日、私が子供を抱っこして外をウロウロしていると、下の階のおばさんが声をかけてきて、スイカを一つ切ってくれました。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과일이라서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참외를 한 입 깨물었다. |||||||||一口|| It was the first fruit I had ever eaten, so I was biting melon with a lot of curiosity. 生まれて初めて食べる果物なので、好奇心旺盛な私はいちごを一口食べました。 그런데 그 맛이 어찌나 쓴지 얼른 뱉으려 했으나 준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삼켰다. |||||||||goodwill||| However, I tried to spit out how bad the taste was, but I swallowed it in consideration of the sincerity. しかし、その味があまりに苦く、すぐに吐き出そうとしたが、ジュンの誠意を思って無理矢理飲み込んだ。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간신히 절반 정도를 먹고 더 이상 먹기가 힘들어 밖에서 먹겠다며 남은 반쪽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In front of her, she barely eaten about half, and it was hard to eat anymore. おばあちゃんが見ている前でやっと半分くらい食べて、これ以上食べられないので外で食べると言って残りの半分を持ってその家を出ました。 아빠트 뒤쪽으로 돌아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가 살핀 뒤 남은 참외 반쪽을 땅에 묻고 발로 밟아 흔적을 없앴다. After going back to Dad, there was no one to see. パパットの後ろに戻り、誰も見ていないことを確認した後、残ったメロンの半分を地面に埋め、足で踏んで跡を消した。 그날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뒤 나는 쓴 참외를 왜 먹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참외만 보면 질겁을 했다. |||||||||||||||panic| |||||||||||||マクワウリだけ||恐怖を感じた| After how angry I was that day, I wondered why I was eating bitter melons, and when I saw melons, I was terrified. その日にどれだけ怒られたか、その後私は苦いメロンはなぜ食べるのかと不思議に思い、メロンだけ見ると怯えるようになった。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내가 먹었던 참외는 설익은 것 이였다. |||||||underripe|| |||||||未熟な|| As I learned later, the melon I ate at that time was unripe. 後で知ったことだが、その時食べたメロンは未熟なものだった。

우리는 꾸바에서 간식으로 빵을 먹던 습관이 들어 조국에 돌아와서도 집에 빵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놓아야 했다. We had a habit of eating bread as a snack in Cuba, so we had to prepare our homes so that they would not fall as much as bread at home. 私たちはクバでおやつにパンを食べる習慣があり、祖国に帰っても家にパンだけは欠かさず用意し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그래서 내가 처음 바깥 심부름을 다닌 곳이 아빠트 뒤편에 있는 밥공장이였다. So the first place I ran outside was the rice plant behind Dad. それで私が初めて外へ用事をしに行ったのが、パパートの裏手にある米工場でした。 밀가루와 쌀을 자루에 넣어 가지고 가서 수수료 30전을 내면 떡이나 빵으로 바꾸어 주었다. I took flour and rice in my sack, and turned it into rice cake or bread when I paid 30 fee. 小麦粉と米を袋に入れて持って行き、手数料30銭を払うと餅やパンに変えてくれた。 나이가 나보다 위인 옆집 녀자아이의 안내를 받아 밥공장에 가서 줄을 섰다. I went to a rice factory and lined up with the guidance of the girl next door who was older than me. 私より年上の隣の女の子に案内され、米工場に行き、列に並ぶ。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의 끝에 서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Quite a few people stood at the end of the line and waited for my turn to return. 結構多くの人が並んでいる列の最後に立って、自分の順番が来るのを待っていた。

얼마를 기다린 끝에 겨우 내 차례가 되여 접수구에 빵과 바꿀 밀가루를 담은 소랭이를 내밀었더니 접수구 아주머니가, “떡은 있는데 빵은 지금 다 떨어졌으니 낙케 오라.”하고 말했다. After waiting for a while, it was my turn, and when I put out the grains of bread and flour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ist said, "There is bread and the bread is now gone. しばらく待ってやっと自分の番になり、受付にパンと交換用の小麦粉を入れたソリンを差し出すと、受付のおばさんが、「餅はあるけど、パンはもう切れたから、ナッケに来て」と言った。 나는 떡만 바꾸어 손에 들고 ‘낙케’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한 채 벙벙해 있는데 옆집 아이가, “나중에 오라는 뜻이야.” 하며 ‘낙케' 가 ‘나중에’라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I changed the rice cake and held it in my hand. 私は餅だけを交換して手に取り、「ナッケ」という言葉の意味がわからずぼーっとしていると、隣の子が「あとで来いという意味だよ」と「ナッケ」は「あとで」という意味だと教えてくれました。 나는 꾸바에서 생활하면서 개성 출신인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도 불편함이 많았다. I lived in Cuba and learned my mother's words from Kaesong. 私はクバで暮らしながら、個性派出身の母の言葉をそのまま学んだので、学校に通うときも不便なことが多かった。

동무들로부터 내 말씨가 황해도 말씨 같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Many of my colleagues have pointed out that my words are like words in Hwanghae. 同志から私の話し方が黄海道の話し方と同じだという指摘をたくさん受けました。 또 일본어를 공부하면서는 일본말을 배우더니 어떻게 우리말을 일본말처럼 간사하게 하느냐고 말을 많이 들었다. ||||||||slyly|||| When I was studying Japanese, I learned how to speak Japanese. また、日本語を勉強していると、日本語を習いながら、どうして韓国語を日本語のように巧妙に話せるようになったのかと言われることが多い。 조국에 돌아와서 시작하는 생활과 환경은 모든 것이 다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고생스러웠다. The life and environment that started after returning to my homeland were all bewildered, strange and troubled. 祖国に戻ってから始まる生活や環境は、全てが戸惑い、慣れないことばかりで大変でした。 다시 꾸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다. There were times a day that I wanted to go back to Cuba. またクバに戻りたいと思うことが1日に何度もあった。 오히려 꾸바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Rather, Kuva felt like my hometown. むしろクバが私の故郷のように感じるほどでした。

집 꾸미기도 끝나고 꾸바에서 부친 짐도 모두 찾아와 겨우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 무릎에 이상이 왔다. I finished decorating my house and all my father's baggage came to the house. 家の飾り付けも終わり、クバからお父さんの荷物も全部来てやっと片付けが終わったところで、今度は私の膝に異常が来た。 조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 검역소에서 검역원이 우려하던 관절염 증세가 나타난 것이였다. When he returned to his homeland, he had symptoms of arthritis that the quarantine was worried about at the Chinese quarantine station. 증세는 갑자기 악화 돼 걷기조차 어려웠다. 症状は||||| 症状は急に悪化し、歩くことすら困難になった。

“지난 번 검역원이 말할 때 무릎에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건데....” “I should have paid attention to the knee when the quarantine officer said last time…” "この前検疫官が言ったときに膝に関心を持つべきだったのに...."

어머니는 검역원이 하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심히 흘려버린 일을 몹시 후회했다. ||||carefully listen||||||| 母は検疫官の話に耳を傾けず、無頓着に流してしまったことをひどく後悔した。 꾸바는 열대지대이기 때문에 랭풍기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 |||fan|||| Since Cuba is a tropical region, it can't live without a cold air. クバは熱帯地方なので、扇風機なしでは過ごせない。 랭풍기가 있는 방에 오래 있어서 관절염에 이상이 왔다는 것이였다. It was because he had been in a room with a cooling fan for a long time and had arthritis. 주사도 맞고 약도 쓰며 어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真心を込めて|| He was given injections and medicines, and his mother worked hard. 注射も打たれ、薬も使われ、母はあらゆる手を尽くした。 다행히도 어머니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관절염은 치료가 되였다. Fortunately, mother's zealous efforts have cured arthritis. 幸い、母の熱心な努力で関節炎は治った。

꾸바에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나자 아버지도 귀국하였고 우리 집은 오르내리기 편한 3층으로 이사해 내려왔다. |||||||||上り下り|||| Six months after returning from Cuba, my father returned home and our house moved down to the third floor, which is easy to climb up and down. クバから帰ってから6ヶ月後、父も帰国し、我が家は上り下りしやすい3階に引っ越した。 나는 이곳에서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선발될 때까지 살았다. I lived here until I was selected as an agent in the Central Party. 私はここで中央党の工作員に選ばれるまで住んでいた。 인민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 그 집에서 다녔기 때문에 가장 정이 든 곳이다. It is the most affectionate place for me because I attended the People's School, Middle School, and University all in the same house. 人民学校、中学校、大学をすべてこの家で過ごしたので、一番思い入れのある場所です。

이 아빠트는 그 시기에 건축한 옛날식 아빠트로 10여 가구당 하나씩의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리용하게 되여 있었다. The Dad was an old-fashioned dad built at that time, with one common capital and one common toilet for every ten households. このアパルトマンはその時期に建築された昔ながらのアパルトマンで、10世帯に1つずつ共同水道と共同トイレを利用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 더구나 연탄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게 되여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温めるように||||| Moreover, it was very inconvenient to cook rice and heat the room by burning briquettes. しかも、煉炭でご飯を炊き、部屋を暖めることになるので、不便極まりない。 수도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였다. Sharing the water and toilet was not uncomfortable and troublesome. 水道とトイレを共同で使うというのは、なかなか不便で面倒なことでした。 여름철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겨울철이 되면 수시로 수도관이 얼어 붙어 물 긷기가 어려워 생활이 참 힘들었다. It was able to endure as it was in summer, but in winter, water pipes were frozen and it was difficult to drain the water, which made life difficult. 夏場はまあまあ耐えられたが、冬場になると水道管が凍り、水を汲み上げるのが大変で、生活が大変だっ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Park Hyun-hyun was a confession of Kim Hyun-hee, Rang Dok, Daenam Institute of Tech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