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다섯 번째-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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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다섯 번째
“숙희와 나는 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짐을 싸면서 마음 속으로 몹시 섭섭해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미 교육이 끝났기 때문에 곧 임무가 부여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작별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나는 숙희와의 광주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내가 숙희보다 먼저 임무를 받고 떠나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 말로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작원 생활이란 사사로운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이는 숙희가 한 살 아래였지만 숙희 역시 공부를 파고드는 성격이었고 자존심이 강해 우리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보통 여자 공작원 두 명이 함께 생활하면 잘 다툰다는데 우리는 말 안해도 통할 만큼 잘 지내왔습니다. 공작원들은 같이 훈련받다 헤어지는 일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교육 과정이 끝날 때쯤이면 곧 헤어지겠구나 하고 예상하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새로운 공작임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작별은 잠깐의 아쉬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숙희와 나는 여자인데다가 뜻이 통했던 사이라 남달리 서운해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금반지를 빼어 숙희에게 주었더니 숙희는 나에게 귀걸이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기념은 추억과 그 물건으로 간직될 것이었습니다. 둘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습니다. 목이 메이기도 했고 달리 할 말도 없었습니다. ‘임무를 받나보다. 잘 해내' 하고 말할 수도 없었고 ‘다시 또 만나자' 하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경쟁상대로, 때로는 친자매처럼 붙어 지내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던 숙희와의 작별의 말은 서로 가슴속에 묻어두려고 했습니다. 우린 그냥 손을 잡았다 놓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내가 숙희에게 준 금반지는 첫 번째 해외여행 때 마카오에서 지도원이 특별히 사준 것이었다. 휴가 때 어머니가 내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보시더니 반지를 빼어 당신 손가락에 끼어 보기도 하고 현옥이 손가락에 끼워 주고 ‘야아, 이 반지 이쁘구나. 아주 잘 어울린다' 고 대견해 하셨던 것이다. 현옥이 시집 갈 때 선물로 줄까도 생각했으나 ‘다음에 주지' 하고 미루어 오다가 그만 숙희에게 주게 되었다. 북조선에서는 여성들이 별다른 장신구가 없어 한때 구리반지가 건강에 좋다는 소문이 돌아 구리반지가 유행한 적이 있으나 금반지는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있는 사람조차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숙희도 이 반지를 탐내며 여유가 생기면 하나 사려고 했지만 형편이 안 돼 부러워만 하던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내가 그 귀한 반지를 작별의 선물로 선뜻 빼주자 처음에는 받아도 되는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숙희와의 작별은 나의 소중한 어떤 것을 주어도 모자랄 만큼 섭섭했다.
“숙희와의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듣기로 하지. 그래서 그 길로 평양으로 복귀했나?”
내가 너무나 숙희에 대한 이야기로 질척거리자 수사관은 은근히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내가 숙희 이야기에 매달린 것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워하면서 다음 이야기로 이어졌다.
“장 지도원은 편지 한 장을 주며 내가 할 일을 일러 주었습니다. ‘북경에 도착하면 대사관 성원이 마중 나와 있을 것이오. 그 사람과 같이 대사관에 가서 항공 대표에게 이 편지를 보이시오. 평양 가는 좌석을 주선해 줄거요. 만일 비행기 좌석이 안되면 기차를 타더라도 바로 평양에 가야만 하오.' 장 지도원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당부했습니다. 10월 6일 오후 3시쯤 광주공항에서 중국 항공기를 타고 출발하여 세 시간 뒤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북경 주재 북한대사관 소속인 50대 운전수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날은 대사관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 2시 나는 민항 대표 박모의 주선으로 평양행 북한 특별 화물기 편으로 평양을 향해 떠났습니다. 나를 태운 특별 화물기는 오후 5시쯤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