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일곱 번째-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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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일곱 번째
“당에서도 동무들에 대한 기대가 크니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야 합니다. 다들 훌륭한 혁명가가 되기 바랍니다.”
몇 명 안 되는 입학생들이지만 학장의 훈시를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었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노동당 작전부에 속해 있으면서 공작원과 전투원에게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한 기본적 자질을 교육시켰다. 공작원에 대한 전문교육은 이 학교에서 교육이 끝난 뒤 해당 부서에 배속된 후에 집중적으로 시키게 된다. 교육 과정은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지도원 등을 통해 듣기로는 정보반, 외국어반, 전투원반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단기 정보반 1기로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우리 일과는 빠듯하게 짜여졌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독보와 강의를 1시까지 듣고, 다시 4시부터 강의를 들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1시간동안 체력단련 및 훈련을 했고, 역시 1시간동안 야간 행군도 했다. 잠은 11시에 잘 수 있었다.
겨울철이면 우리는 아침 기상과 동시에 벽난로 불을 보러 나갔다. 숙희와 나는 일 주일씩 교대로 벽난로 당번을 맡았는데 당번 때가 되면 잠을 자면서도, 훈련을 받다가도 벽난로 불 걱정을 하게된다. 벽난로 불이 한 번 꺼지면 다시 불을 붙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초대소 뒤편에 있는 벽난로 화구로 가서 비트복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고 불을 보게 된다. 불이 살아 있으면 재를 밑으로 털고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 불 위를 덮듯이 올려 놓은 뒤 쇠꼬챙이로 구멍을 뚫어 주면 석탄이 마르면서 타게 된다.
그러나 불이 꺼져 있으면 장작을 태워 화력 좋은 숯불로 만든 뒤 그 위에 석탄을 올려 놓고 불을 살려야 했다. 그런데 젖은 석탄이 탈 수 있도록 화력을 맞추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어떤 때는 불을 다시 살리려고 하루종일 화구에 붙어앉아 석탄과 씨름을 할 때도 있었다. 도저히 불을 살리지 못하면 관리원 아저씨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선물하면서 불을 붙여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벽난로 불을 볼 때마다 손이나 팔을 데었다. 벽난로 불을 보고 나면 집안 청소와 세면을 하고 아침식사를 한 뒤 30분간 ‘민족의 태양' 등 김일성 덕성 자료를 읽는다. 그리고 군복 차림에 마스크와 색안경을 쓰고 우산을 펴들어 안면 위장을 철저히 하고 강의실로 출발한다. 처음에는 그 차림이 너무 어색하고 창피스러웠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강의실에서도 안면 노출은 물론 음성까지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말과 질문은 일체 못하고 일방적으로 강의만 듣게 된다. 저녁 행군 중에 다른 공작원과 만나게 되면 서로 피해야 하며 피해 있을 때는 우산을 펴들어 앞을 가린다.
낮에는 언제나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한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가 지나갈 때까지 안면 로출이 되지 않도록 우산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뒤돌아서서 있어야 한다. 밤에도 우산까지는 들고 다닐 필요가 없지만 사람을 만나면 길 옆에 비켜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숙희와 나는 훈련 외에도 토끼를 기르고 여름에는 자체적으로 부식을 조달하기 위해 초대소 앞 남새밭을 일궈 오이, 토마토, 참외 등을 심어 가꾸어야 했다. 종일 학습이다 훈련이다 행군이다 바쁜 중에 밭을 가꾼다는 일은 하나의 짐이고 고통이었다.
우리는 매월 115원을 월급으로 받아 50원은 저축하고 65원은 공작원 전용상점에서 내의, 화장품, 비누, 칫솔, 치약 등을 사서 썼다. 매일 고기국이 나왔고 간식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과자, 사탕, 사이다, 맥주, 사과, 배, 마른 명태가 배급됐다. 우리에 대한 식량 배급량은 하루 입쌀 700g 이었다. 이것은 북조선에서 최고의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