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아홉 번째-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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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아홉 번째
수사관들은 자기들끼리 롱담을 하고 소리죽여 킥킥대고 웃었다. 나 역시 그들의 롱담이 얼마나 우스운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대로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얼마나 내 정체를 숨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바레인 경찰 조사실에서는 줄곧 수갑을 채워 침대에 연결시키는 등 신체적 구속이 심했다. 또 핸더슨과 마리아가 나의 정체를 알기 위해 매일매일 들볶아 대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신체적 제약도 들볶아대는 사람도 아직 없는데 순간순간을 넘기기가 힘겨웠다. 사람대접도 해주고 대화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웠지만 그것이 내게는 함정이었다. 빨리 사실대로 모든 것을 불라고 강요받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강요하면 딴청을 부리거나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버틸 수 있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내 스스로도 불가항력적인 패배가 있으리라고 예상되었다. 그것은 조사하는 특무들도 조선인이고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나 역시도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남산 지하 조사실은 평온하고 조용한 가운데 나를 점점 더 압박해왔다.
아침식사도 끝나고 나는 남자 수사관 1명, 여자 수사관 2명과 함께 한가하게 조사실 내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았던 남자 수사관이 “우리 이렇게 무료하게 앉아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노래나 하나씩 부르는 게 어때?”하고 의견을 내놓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 사고방식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이리도 태평스러운지 몰랐다. 중국 사람이라면 원래 ‘만만디'라 하여 무엇이든 천천히 하는 성질이지만 우리 조선족은 성급한 성질인데 이 특무들은 그렇지도 않은가 보았다.
‘지금 노래나 한가락씩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질 않은가. 윗 간부들이 어떤 지시를 내렸기에 저 사람들이 저토록 무료해 하는가. 우선 나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 같은데 건강도 이만하면 회복이 되었고.. 곧 무슨 조치가 취해지겠지.' 남자 수사관은 네 사람 중에서 최라는 성을 가진 여자수사관을 제일 먼저 지명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머뭇 하더니 ‘산토끼'라는 짧은 노래를 불렀다. 다음에는 이씨 성을 가진 여자가 ‘고향의 봄'을 노래했다. 나는 ‘고향의 봄'을 들으면서 속으로 ‘아! 이 노래'하고 소리쳤다. 내가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아이들은 이 노래를 배웠고 고무줄놀이 하는 데도 많이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동요는 모두 사라지고 수령과 지도자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만 불러야 했다. 나는 여자 수사관을 따라 속으로 가만가만 불러 보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다나니 개성 외갓집 생각이 났다. 우리 외갓집은 산골은 아니지만 개성 어느 시냇가에 있었는데 우리 조선 고유의 한옥 기와집이었다. 실개천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졌고 늦가을에는 개천 옆 길가로 코스모스가 한 아름씩 무리지어 피어났다. 봄에는 노래 가사 그대로 울긋불긋 온통 진달래가 뒤덮여 산이 붉어 보일 정도였다. 할머니 댁 한옥 마당에도 언제나 꽃이 피어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나의 마음은 외갓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노래 부른 수사관이 나를 지명했다.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했지만 그들은 쉽게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도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나는 중국 노래를 하나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자 수사관들은 열렬하게 박수를 쳐주며 한 곡을 더 부르라며 재창을 요구했다.
“이제 중국 노래를 한 곡 했으니 조선 노래도 한 곡 해야지. 한국에 왔으니 그게 예의가 아니겠어.”
남자 수사관의 말을 여자 수사관이 일본 말로 통역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