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아홉 번째-39
[...]
나의 대학시절, 열 아홉 번째
지금은 너도 나도 중앙당 사람으로 위세하려고 당기발 초상 휘장을 구해 다는 바람에 흔해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당기발 초상 휘장을 달 수 있는 사람은 중앙당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나에 대한 문건을 보고 있는지, “김현희 동무!” 하고 나를 먼저 불러 세웠다.
“동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덕성실기를 많이 학습했겠지? 생각나는 거 있으면 하나 발표해 보시오!”
그는 극히 사무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나는 김정일 덕성실기 중 ‘백두산에 오르시여' 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는 김정일이 백두산에 가서 김일성의 전적지를 꾸리는 현장을 돌아보면서 일군들에게 수령님의 혁명 사적지를 더 잘 발굴하고 더 잘 꾸릴 데 대한 강력적 지침을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였다. 이러한 내용 발표가 끝나자, 아버지, 어머니 직장 직위가 무엇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무역부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부양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끝으로 그는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냐며 묻고 끝을 냈다.
나는 당시 김일성 혁명력사 연구실 소조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인정하는 성실성과 우수한 성적의 소유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이 소조는 김일성 혁명력사에 대한 연구를 중점으로 관리 운영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가장 신경쓰는 소조이다. 전교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성실한 녀학생 10명을 뽑아 이 소조를 운영한다.
다른 학생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담화를 간단하게 끝냈다. 학생들에 대한 사항이야 문건을 보면 모두 알 수 있었지만 담화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됨됨이를 료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중앙당에서 나와서 담화를 하고 간 일을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뭣 때문에 그러나” 하며 별 관심없이 지나쳤다.
전에도 이런 식의 담화는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학부장이 녀학생들만 일렬로 서서 강당으로 가보라고 했다. 어디선가 나온 사람들이 강당에서 녀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찬찬히 관찰하다가 인물이 괜찮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에게는 이름을 물어 보았다. 수업이 두 시간 끝나고 업간체조 시간에 학부 지도원이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지도원을 따라가 보니 지난번 강당에서 전교 녀학생들을 면접했던 영화 촬영소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일의 지시로 춘향전에 출연할 배우를 찾아 다니는 것이라 했다. 촬영소 사람들은 나를 세워 놓고 앞 뒤 옆 사진을 찍어 갔다. 이 일로 해서 짖궂은 남자애들은 나만 지나가면,
“야아 , 춘향이가 리도령을 만나러 간다.”며 놀려대였다.
그러나 후에 들리는 말로는 나는 동양적 미모가 아니기 때문에 춘향이로는 적합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다.
이런 담화가 수시로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이번 중앙당 담화에도 별로 놀라지 않고 넘겼던 것이다. 중앙당 담화가 있은 지 10여일 동안 그 자체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2월 하순 쯤 점심식사 후 오후 영어 시간이 막 시작되려는데 학부 지도원이 교실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았다. 책을 챙겨 혁명력사 연구실 소조실에 갖다두고 간부과 지도원에게 가보라고 하였다. 본청사 간부과에 가서 지도원을 만났더니,
“오늘 3시까지 평양시당 조직부 1과에 가보라. 정문에 가면 거기 지도원이 나와 있을 거다. 평양시당 청사 알지?” 라고 말했다.
내가 갑자기 평양시당 위원회 건물 위치가 생각나지 않아 우물쭈물 하자 그는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거 김일성광장.......참, 동무 아버지가 무역부에서 일하지? 무역부 청사길 건너편에 길에서 약간 들어가 있는 건물이야.”
내가 알겠다고 하니 나에게 빨리 가보라고 재촉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